본문 바로가기

쇼팽의 마지막 사랑 상드, 그러나 그녀에게 쇼팽은…

중앙일보 2020.02.07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62·끝)

 

조르주 상드. Nadar의 사진. 1864년.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조르주 상드. Nadar의 사진. 1864년.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사망 소식을 들은 상드는 흔들렸다. 상드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썼다. 그녀는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 강한 쇼크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상드는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내 아이처럼 이 신사를 돌보고 위로한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에 굶주린 상드의 딸 솔랑주가 쇼팽은 처음 만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솔랑주에게 쇼팽은 엄마나 오빠보다 더 공감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쇼팽의 피아노 아래에서 컸다. 그의 마술 같은 멋진 음악은 내 어린 시절의 흔치 않은 좋은 기억으로 내 영혼에 깊이 남아있다.”
 
솔랑주는 1849년 5월 둘째 딸 니니(본명은 잔느 가브리엘르)를 낳았다. 한때 절연을 선언했었지만 상드는 손녀를 낳은 딸을 노앙에 받아들였다. 상드에게 솔랑주는 여전히 못마땅한 딸이었다. 그러나 손녀 때문에 둘의 관계는 대체로 괜찮았다. 상드는 손녀 니니에게 온갖 애정을 쏟았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애는 할머니한테 맡기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쓴다고 솔랑주를 비난했다. 21세도 안된 애 엄마한테 얼마나 기대한 걸까?
 
솔랑주와 남편 클레징제의 관계는 결혼기간 내내 좋지 않았다. 둘은 1855년 12월, 정식으로 이혼했다. 상드는 집안의 높은 도덕적 기준을 들어 이혼한 딸을 점잖게 꾸짖었다. 상드는 자기 자신과 딸을 다른 잣대로 재고 있었다. 이혼 후 아이 니니의 양육권이 문제였다. 니니는 양육권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노앙의 할머니 곁을 떠나 파리의 열악한 보호소에 맡겨졌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니니는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이듬해 1월, 겨울 바람 속에 부실하게 입은 채 아빠 클레징제와 외출하고 돌아온 후 아이는 앓아 누웠고 고열에 시달리다 며칠 못 가서 숨을 거두었다. 솔랑주는 6살 딸이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 엄마를 보고 웃는 마지막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다.
 
상드도 손녀를 잃고 충격을 받아 초췌해졌다. 손녀의 시신은 노앙에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딸은 노앙에서 쫓겨났다. 솔랑주는 아기의 기일에 노앙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도 제한 받았다. 손녀와 다른 가족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친구, 동네 주민, 모든 지인들이 받고 누렸던 ‘인자한’ 상드의 혜택과 베풂이 딸 솔랑주에게만은 넉넉하지 않았다.
 
솔랑주는 몇 편의 소설을 냈지만 주목 받지 못했다. 솔랑주가 어려울 때, 먹을 것을 찾아 노앙의 집에 불쑥 들리기도 했는데 상드는 먹을 것을 주기는 했지만 말은 걸지 않았다. 솔랑주는 여러 명의 남자를 만났지만 불행하게 살았다. 상드는 솔랑주를 거리의 여인에 비유했다.
 
만년의 솔랑주. 조르주 상드의 딸. 작가 미상. 1880~90년대. [사진 Wikimedia Commons]

만년의 솔랑주. 조르주 상드의 딸. 작가 미상. 1880~90년대. [사진 Wikimedia Commons]

 
아들 모리스는 늦도록 배우자를 찾지 못했다. 상드는 다 큰 아들이 집을 나가 있으면 언제나 걱정을 늘어놓았다. 40세 직전에 모리스는 상드의 오랜 친구였던 화가 루이기 칼라마타의 딸과 결혼했다. 상드는 평범하고 얌전한 며느리를 반겼다. 모리스는 첫 아들을 잃고 이어 두 딸을 두었다.
 
1847년 이후 기찻길은 노앙 인근의 샤토루까지 연장되었는데 아침에 파리를 출발하면 노앙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상드는 수 많은 친구들에게 가까워진 노앙을 선전하며 초대장을 날렸다. 많은 사람들이 노앙을 방문했다. 자유로운 상드는 주기적으로 파리에 와서 유명한 문인, 지식인들의 모임(Dîner Magny)에 유일한 여성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 해에 모리스는 자기 친구이며 화가였던 망소(Alexandre Manceau, 1817~1865)를 상드에게 소개하여 그녀의 비서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말 없고 소박한 망소는 세심했고 성실했다. 항상 상드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폈다. 물을 떠다 주었고 담뱃불도 붙여주었다. 평생 남을 챙겨주며 살았던 상드는 감격했다.
 
망소의 헌신에 일생일대의 편안함을 찾은 상드는,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딛고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사람’을 얻었다고 했다. 둘의 관계는 15년간 지속하였고 잡음도 없었다. 그러나 아들 모리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과의 갈등이 깊어지자 상드와 망소는 노앙의 저택을 나와 따로 살았다.
 
망소도 결핵을 앓았다. 상드는, 그에게 빚진 것을 갚는다며 죽어가는 그를 밤낮으로 보살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그를 깨워 물을 마시게 했을 때 그는 잠꼬대처럼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상드는 그를 감싸 안아 다독여주었다. 다시 잠든 망소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를 묻고 상드는 노앙으로 돌아가 손녀를 돌보며 지냈다. 만년의 그녀는 손녀를 위한 동화를 여럿 썼다.
 
노앙 저택의 뒤뜰에 앉아있는 조르주 상드 일가. 상드는 파라솔을 쓰고 있고 두 손녀와 아들 모리스, 며느리 리나가 같이 있다. 플라시드 베르도의 사진. 1875년 4월 26일. [사진 Wikimedia Commons]

노앙 저택의 뒤뜰에 앉아있는 조르주 상드 일가. 상드는 파라솔을 쓰고 있고 두 손녀와 아들 모리스, 며느리 리나가 같이 있다. 플라시드 베르도의 사진. 1875년 4월 26일. [사진 Wikimedia Commons]

 
상드의 편지 소통은 유명했다. 당시 유럽의 문인, 예술가, 사상가, 지식인들 중에 상드와 편지를 주고 받지 않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녀가 평생 쓴 편지는 4만통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의 화신 상드의 마지막 연인은 샤를 마르샬이었다. 그는 아들 모리스보다 2살이 아래였는데 우편배달부는 아니었고 화가였다.
 
정치참여는 2월 혁명 실패 이후 자제했다. 자유롭고 곡절 있는 삶 속에서도 상드는 마지막까지 정력적으로 책을 써냈다. 그녀는 복통을 달고 살았지만 그것을 숨겼다. 1876년 72세의 상드의 건강은 심하게 나빠졌고 고통은 견디기 어려웠다. 상드는 의사인 친구를 통해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딸 솔랑주는 파리에서 급히 노앙으로 달려갔다. 가족들이 다 모여있었다.
 
상드는 손녀들에게 키스해달라고 부탁했고 솔랑주와 며느리에게는 “안녕, 잘 있어.” 하고 속삭였다. 장폐색(腸閉塞)으로 인한 마지막 고통은 심했다. 솔랑주는 엄마가 고통 받을 때마다 꼭 안아주었다. 조르주 상드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고 딸은 엄마의 눈을 감겨주었다. 솔랑주는 쇼팽의 눈을 감겨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노앙의 교회에서 열린 상드의 장례식에는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 중에는 파리에서 급히 달려온 나폴레옹 3세의 아들도 있었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가 추도사를 썼고 『보바리 부인』의 저자 플로베르는 ‘바보같이’ 눈물을 흘렸다.
 
날 때부터 엄마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로 때로는 과한 비난과 질책을 받으며 살았던 솔랑주였지만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했다. 상드가 세상을 떠나고 7년이 흐른 후, 솔랑주는 노앙 저택의 테라스에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큰 슬픔이 이 집안과 정원에 가득해요. 조르주 상드 없는 노앙은 시심(詩心)도 없고 매력도 없어요.”
 
모리스의 두 딸에게는 자손이 없었다. 때문에 상드의 대는 끊어졌다. 상드가 아꼈던 큰 손녀 오로르는 노앙의 저택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약속했다. 그녀가 1961년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정부는 그 저택을 받아들여 조르주 상드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파리 몽소공원의 쇼팽 기념비. 쟉크 프로멍-모리스 조각. 1906.[사진 송동섭]

파리 몽소공원의 쇼팽 기념비. 쟉크 프로멍-모리스 조각. 1906.[사진 송동섭]

 
쇼팽에게 초점을 맞춘 자료에서 쇼팽과 상드의 관계는 bitter-sweet으로 표현된다. 상드와의 관계 속에서 괴로움과 즐거움, 두 가지 모두를 쇼팽이 맛보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상드의 냉정함이 보였지만 상드는 쇼팽에게 집과 가족을 제공했다. 그 밖에도 둘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상드가 쇼팽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쇼팽의 생은 짧았지만 상드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더 짧았을 수도 있었다.
 
그들 둘의 천성은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둘은 오랜 시간을 같이 했다. 이른 시기에 기념비적인 쇼팽의 전기를 남긴, 프레데릭 닉스(Frederick Niecks. 『Frederick Chopin as a Man and Musician, 1888』)에 의하면 그것은 ‘상드 내면에 잠재한 시적 심성이 쇼팽이 품고 있었던 서정적 정서와 서로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랑을 받는 쇼팽의 왈츠 작품번호 69-2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은 19세 때였는데 당시 그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누구나 젊었을 때 궁금해하고 고민도 하던 그 앞날을, 지나고 나서 보면 다 미리 정해진 대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