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들것 실려도 상 받겠다" 임종 직전까지 영화인이었던 신성일

중앙일보 2020.02.07 00:35 종합 22면 지면보기
이만희 감독의 ‘군번 없는 용사’에서 6·25 당시 각각 반공 유격대장과 북한군 장교로 나온 신영균과 신성일. [중앙포토]

이만희 감독의 ‘군번 없는 용사’에서 6·25 당시 각각 반공 유격대장과 북한군 장교로 나온 신영균과 신성일. [중앙포토]

1960년대는 한국영화 황금기였다. 김승호·김진규·최무룡·신성일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이제는 정말 별이 돼 하늘을 수놓고 있다. 남자 배우 중 남궁원·윤일봉이 살아 있다.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3)
<24> 충무로 최고 스타 신성일

배우·감독·국회의원 열정적 삶
520편 넘는 출연작 대기록 세워
사석에서 ‘형님’ 하며 잘 따라줘
배우협회장 선거 문제로 오해도

2018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난 신성일은 나보다 아홉살 아래다. 사석에서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술을 좋아했지만 워낙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기에 나보다 먼저 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2005년 불미스런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도 콘크리트 역기를 들고, 3m짜리 빗자루로 하루에 20~30번씩 골프 스윙 연습을 했다는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던 그가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타계 6개월 전 투병 소식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 전화를 걸었다. 내 어머니도 폐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걱정이 많이 됐다.
 
“폐암은 공기 좋은 곳이 제일이야. 내 제주도 집에 와서 좀 쉬어.”
 
“형님, 전 괜찮아요. 하려던 것만 마무리하고 한번 갈게요.”
 
타계 직전까지 영화만 생각하고 살아 
 
영화 ‘맨발의 청춘’. [중앙포토]

영화 ‘맨발의 청춘’. [중앙포토]

그는 끝내 내려오지 못했다. 투병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자 “그깟 암 다 내쳐버리겠다”며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전남 순천의 한 요양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기력을 좀 회복했다는 얘기를 듣고 “역시 신성일”이라고 생각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북한에 있다는 ‘만추’(1966) 필름을 찾아오고 싶다”며 열정을 불살랐다.
 
신성일은 임종 직전까지 철두철미 영화인이었다. 타계 닷새 후 열린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의 제8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상 시상식에도 꼭 오겠다고 약속했다. 수상자 선정 소식을 듣고 “들것에 실려서라도 꼭 갈게요, 형님”이라고 했던 그다.  
 
그는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도 아들을 통해 “직접 가서 꼭 받고 싶었는데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는 뜻을 재단 측에 전해왔다. 2014년 그보다 먼저 같은 부문에서 상을 받은 아내 엄앵란이 대리 수상을 했다.
 
신성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래 무려 52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까지 총 535편의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다. 욕심이 많아 보여 종종 “배우는 자기를 다스려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그 열정이 신성일을 20세기 최고 스타로 끌어올린 에너지가 된 것 같다.
 
우리가 처음 함께한 작품은 신상옥 감독의 ‘상록수’(1961)다. 신성일은 나와 함께 농촌계몽 현장에 뛰어든 최은희를 돕는 마을 청년으로 등장한다. ‘서울의 지붕 밑’(1961), ‘연산군’(1961)에서도 단역으로 나온다.
 
둘 다 신 감독이 차린 영화사 ‘신필름’ 전속 배우였지만 초창기 때의 처우는 달랐다. 숱한 연극무대를 거친 내가 데뷔작 ‘과부’(1960) 때부터 주연을 많이 맡은 반면 신성일은 그때까지만 해도 스타 지망생이었다. 신성일은 신필름 전신인 서울영화사 신인 모집 때 5815명 중 한 명으로 뽑히면서 ‘로맨스 빠빠’의 막내아들 역을 따냈다. 신 감독이 주로 단역만 맡기자 그는 갈증을 느낀 것 같다. 신필름을 떠나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를 찍었고, 그때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을 찍으면서 최고의 청춘스타로 부상했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만 36만 관객을 기록했고, 그해 11월 상대 배우 엄앵란과 장안을 뒤흔든 결혼식을 올렸다. 67년에는 무려 51편에 출연하며 탄탄한 입지를 다졌다.
 
라이벌로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신성일의 맨발. [중앙포토]

신성일의 맨발. [중앙포토]

한때 한솥밥을 먹던 신성일과 내가 나란히 주연 배우로 활동하면서 우리를 라이벌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경쟁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사극, 그는 청춘멜로, 주력 분야가 달랐고 캐릭터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났다. 함께한 영화 30여 편 중 영화사에 남을 작품이 적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78년 내가 은막을 떠난 후로도 인생 선배로서 늘 그를 응원해왔다.
 
본의 아니게 내가 신성일을 서운하게 했던 적도 있다. 70년대 중반 한국영화배우협회장 선거를 앞두고, 그가 부탁을 해왔다. 지금과 달리 배우협회는 당시 파워가 셌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으면 영화에 나올 수 없었다.
 
“형님, 제가 배우협회장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이번에는 선배 장동휘가 나온다고 들었는데, 너무 욕심내지 말고 다음에 하지 그래?”
 
신성일은 철석같이 믿었던 내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자 실망한 기색이었다. 68년부터 14·15대 배우협회장을 지낸 내가 선거의 주요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에 행동을 조심했던 것 같다. 결국 장동휘가 19·20대(75~76년) 협회장을 지내고, 신성일은 이듬해 21대 협회장을 맡았다. 신성일은 지인들에게 “처음에는 장동휘를 밀어준 것 같아 서운했는데, 나중에 제가 찾아가서 ‘형님 잘못했습니다’ 하며 도와달라고 했다”고 말하곤 했다.
 
신성일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어려움에 부닥친 주변 영화인을 많이 챙겨줬다.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한 그는 71년 세 번째 연출작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서 내게 주연을 부탁했다. 당시엔 관객 5만 명만 넘겨도 성공이었는데 이 영화는 72년 1월 국도극장에서 13만6000명을 끌어들였다.
 
신성일은 배우·감독·국회의원(16대·2000~2004) 등 평생을 진짜 영화처럼 살다 갔다. 나와 달리 연애도 뜨겁게 했다. ‘뉴스타 넘버원(성일·星一)’, 신상옥 감독이 데뷔 당시 붙여준 이름처럼 말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