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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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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방역망 뚫리면 체제 위협”…‘셀프 제재’ 돌입한 평양

중앙일보 2020.02.07 00:33 종합 26면 지면보기

신종 코로나 유입될까 문 닫아건 북한

지난해 말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새해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북한이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지난해 말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새해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북한이 선전·선동을 강화하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산과 물이 잇닿은 인방(隣邦)’이라며 혈맹 관계를 과시해온 이웃 국가 중국에서 창궐하는 데다, 열악한 북한의 방역체계가 아킬레스건이란 판단에서다. 한번 뚫렸다가는 김정은 체제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외부로 통하는 육·해로와 하늘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일이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관영 매체는 “이 위험한 전염병이 우리나라에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한사람 같이 떨쳐 나서야 한다”며 대책을 다그치고 있다. 북한의 교역과 인적 왕래를 막아온 대북제재에 반발해온 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스스로 장벽을 쌓는 ‘셀프 제재’에 나선 형국이라 말이 나온다.
  

평양도 마스크 생산 라인 풀가동
“남조선 환자 발생” 꼼꼼히 보도
경제 살리기 ‘돌파전’ 차질 올 듯
민생 강조한 김정은 이번엔 침묵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두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두고 마주하던 찰나 회담장인 남측 지역 ‘평화의 집’에선 북측 경호·의전 요원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김정은이 서명할 방명록과 책걸상을 소독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분무기로 소독약을 뿌리고 흰 천으로 팔걸이와 등받이 등 곳곳을 닦아냈다. 서명용으로 준비된 펜도 소독했다. 도청장치나 폭발물 등 위협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보다 소독에 더 공을 들이는 모습은 우리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정작 방명록에 글을 남길 때 김정은 위원장은 준비된 펜이 아닌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건넨 필기구를 사용했다. 북측이 김정은의 신변 경호에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세균이나 화학 물질을 활용한 은밀한 테러나 위해(危害) 가능성에 철저히 대비하는 모습은 북한 경호팀의 중요 체크포인트라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의 귀띔이다.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독극물인 VX를 이용해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북한 당국으로선 누구보다 그 위험을 잘 알 수밖에 없다.
 
백두산 지역이 영하 40도를 기록했다는 일기예보. [조선중앙TV 캡처]

백두산 지역이 영하 40도를 기록했다는 일기예보. [조선중앙TV 캡처]

최근 입수된 북한의 내부 문헌에는 손에 피부병이 걸린 여성 지배인을 최고지도자의 공장 현지 방문 시 접견자로 선발했던 고위 간부가 ‘수령을 제대로 보위 못 한 반역자’로 단죄되는 장면이 담겨있다.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퍼지자 해외 방문을 다녀온 최용해 노동당 비서는 아예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방에 한동안 격리됐다. 김정은과의 접촉은 금지된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이처럼 감염병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해온 북한으로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이 큰 걱정거리일 수밖에 없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볼 때 2002년 중국에서 발생해 퍼졌던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나 2012년 발병한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보다 훨씬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다. 감염병에 취약한 북한으로선 자칫 체제의 명운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는 절박감까지 감지된다. 윤효성 평양시 위생방역소장은 5일 조선중앙TV에 출연해 “지금 코로나비루스 차단을 우리 국가의 안전과 인민의 생명과 관련된 중대한 사업으로 보고 전 국가적으로 힘있게 대책을 다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각 보건성과 농업성·상업성 등 중앙기관 책임일꾼(주로 장관급을 지칭)이 참여하는 노동당 중앙비상방역지휘부가 구성됐고, 의심환자 검진에 매일 3만여 명이 투입되고 있다. 평양피복공장과 사동옷공장 등에선 생산 라인을 풀 가동해 하루 수만 개의 마스크를 생산하는 중이다.
 
북한이 유달리 사태의 심각성과 대응 장면을 관영 매체로 공개하는 것도 주목된다. 과거 감염병의 확산이나 재난·재해 발생 사실, 구체적인 피해 내용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것과 차이가 난다. 6일에도 조선중앙TV는 오후 3시 30분 정규방송 시작 직후부터 7분 안팎의 ‘신종 코로나 비루스를 철저히 막자’는 내용의 캠페인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밤 11시 종료 때까지 3차례 반복했다. 오후 보도와 밤 종합보도, 마감뉴스에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비중 있게 다뤘다.
 
한국에서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전한 5일 조선중앙TV. [조선중앙TV 캡처]

한국에서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전한 5일 조선중앙TV. [조선중앙TV 캡처]

전담 앵커를 두고 관련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우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내 감염 실태와 대응 조치를 소개하고 국제 사회로의 확산 추세와 예방책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구체적인 수치를 그래픽 자료로 보여주면서 그날그날 “남조선에서도 감염자 00명, 의진자(의심되는 환자) 00명이 발생했다”고 보도하는 식이다. 특히 중국 상황을 전할 때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려는 듯 “하루 사망자 기록의 최대치”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
 
북한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는 단 한명도 없다는 점을 관영 매체들은 강조한다. 지난 2일 송인범 보건성 국장이 ‘감염자 없음’을 밝혔지만 외부에서 은폐 의혹이 이어지자, 6일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신형 코로나비루스 감염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해서 탕개(물건의 동인 줄을 팽팽하고 긴장감 있게 죄어주는 기구)를 늦춰선 안 된다”고 우회적인 주장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노동신문이 강원도 비상방역지휘부의 움직임을 전하면서 “격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원들을 고정시키고 보호복과 마스크를 비롯한 의료품을 원만히 보장해주기 위한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밝힌 대목을 들어 환자 발생 가능성을 점치는 시각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가뜩이나 팍팍한 북한 경제와 주민 살림살이에 주름을 더하고 있다. 지난 연말 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를 연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과의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정면돌파전’을 선언했다. 노동당 창당 75주년을 맞는 올해 이른바 자력갱생을 기치로 경제력 다지기에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미처 본격적인 착수도 하기 전에 신종 코로나 먹구름이 북한에 밀려들었다. 김정은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간의 정상외교는 물론 북·중 국경을 통한 교역이나 밀무역도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과 서방의 대북제재에도 든든한 뒷심이 됐던 중국 지도부와 북한 경제의 산소호흡기 역할을 해온 비공식 거래가 모두 무너질 판이다. 노동신문이 6일 정면돌파전의 관철을 촉구하며 노동당 간부들에게 “시키는 일이나 하는 월급쟁이, 기회주의자로 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다그친 건 이런 내부 긴장감을 반영한다.
 
북한은 신종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문을 연 평안남도 양덕 온천관광지구에 예약이 넘쳐나고 이미 2만5000여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고 선전한다. 2013년 개장한 강원도 마식령스키장도 스키 관광으로 붐빈다는 게 평양방송의 보도다. 김정은이 주도해 건설한 시범 관광지를 부각 선전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중국인 관광객이 완전히 끊긴 데다 북한 주민들도 잔뜩 위축된 상태라 실제 상황은 선전과 다르다고 한다. 주북 러시아 대사관은 지난 4일 페이스북을 통해  “호텔·상점 등에서 외국인 대상 영업이 중단됐고 신임 외교관의 부임도 중단됐다”고 전했다. 홍수 등 재난 때마다 구조와 대책 마련을 주문하며 ‘민생 챙기기’ 이미지를 띄우던 김정은 위원장은 신종 코로나 사태에 침묵하고 있다.
 
강릉 무장공비에 김격식까지 띄우는 북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때 자폭·사살 된 25명의 북한 무장공비를 ‘자폭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북한이 이들 시신이 묻힌 ‘조국해방전쟁 참전 열사릉’에 만든 부조 형태의 조형물. [조선중앙TV 캡처]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때 자폭·사살 된 25명의 북한 무장공비를 ‘자폭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북한이 이들 시신이 묻힌 ‘조국해방전쟁 참전 열사릉’에 만든 부조 형태의 조형물.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이 1996년 9월 잠수함을 타고 동해 상으로 침투했다 자폭·사살된 북한 무장 요원들을 ‘강릉의 자폭 용사’로 찬양하고 나섰다. 조선중앙TV는 6일 강원도 강릉으로 침투했던 김동원 소장(사건 당시 대좌)을 비롯한 25명의 북한군을 “수십만 적군들의 포위 속에서도 영웅적 위훈을 발휘했다”고 치켜세웠다.
 
중앙TV는 이들이 잠수함을 타고 침투한 뒤 문제가 발생하자 “장수봉 앞이다, 돌파할 가능성은 없다. 전원 자폭을 각오한다”는 전문을 북으로 날린 뒤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송환받은 이들의 유해를 ‘조국해방전쟁 참전 열사릉’에 묻히도록 조치했다면서, 김정은이 “전쟁 참가자는 아니지만 적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영웅”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선중앙TV는 또 천안함 폭침 도발의 주역으로 알려진 김격식(2015년 사망) 전 인민무력부장을 김정은이 “충직한 전사”라고 격찬한 사실을 소개했다. 김 위원장이 “인민군 부대 방문 때 김격식 동무를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다”며 두터운 신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김격식은 2009년 2월 군 총참모장에서 황해도 지역을 관할하는 북한군 4군단장으로 옮겼고, 이듬해 3월 천안함 폭침과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이 강릉 무장공비와 김격식에 대한 찬양 보도를 최근 되풀이하는 건 김정은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 맥락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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