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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풍자극에 아카데미 간 감독 "살인의 추억, 내 인생영화"

중앙일보 2020.02.04 14:18
 할리우드 영화 '조조 래빗'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 봉준호 감독(왼쪽부터). 지난달 27일 미국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후보 오찬 행사에서 만나 서로 팬심을 표했다. [AFP=연합뉴스]

할리우드 영화 '조조 래빗'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과 봉준호 감독(왼쪽부터). 지난달 27일 미국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후보 오찬 행사에서 만나 서로 팬심을 표했다. [AFP=연합뉴스]

“봉준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살인의 추억’은 내 인생 영화 톱 10에 든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들의 오찬 자리에서 봉준호 감독 곁에 딱 붙어 팬심을 드러냈던 남자. 마블 히어로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를 연출한 뉴질랜드 출신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45)다.

'기생충' 아카데미상 경쟁작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2차대전 코미디
"폴리네시아계 유대인이 히틀러역,
이보다 더 히틀러 모욕할 수 있을까?"

 

'기생충' 경쟁작 아냐, 봉준호와 나는…

'조조 래빗'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무대로 나치 소년단을 꿈꾸는 10살 독일 소년 조조 베츨러(로만 그리핀 데이비스)와 유대인 소녀를 감춰준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의 이야기를 그렸다. 가운데 앉은 조조의 상상 속 친구 히틀러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 [AP=연합뉴스]

'조조 래빗'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무대로 나치 소년단을 꿈꾸는 10살 독일 소년 조조 베츨러(로만 그리핀 데이비스)와 유대인 소녀를 감춰준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의 이야기를 그렸다. 가운데 앉은 조조의 상상 속 친구 히틀러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 [AP=연합뉴스]

위기에 처한 토르의 유머 넘치는 모험담으로 흥행과 비평에 성공한 그가 이번엔 10살 나치 소년의 눈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코미디 영화 ‘조조 래빗’(5일 개봉)으로 돌아왔다. 오는 9일(현지시간) 열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각색·편집·미술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봉 감독의 ‘기생충’과 겨룬다.
 
1일 중앙일보와 단독 전화 인터뷰로 만난 그는 봉 감독과 만난 소감으로 “뉴질랜드와 한국은 공통점이 많더라”며 “우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로서, 할리우드, 미국을 비슷한 시선으로 봤다. 팬 보이들처럼 대화하며 웃음을 나눴다”고 쾌활하게 말했다. “‘기생충’은 경쟁작이 아니다. 우린 서로 서포트하는 사이”라며 봉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여러 장르, 시대, 분위기의 혼합. 무섭고도 재밌다”고 들었다.
 

10살 아이 눈에 비친 2차 대전 코미디

무거운 주제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솜씨는 ‘조조 래빗’도 못지않다. 주인공은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과 단둘이 사는 꼬마 조조(로만 그린핀 데이비스). 겁쟁이 토끼(rabbit·래빗)라 놀림 받으면서도 히틀러 소년단(유겐트)에 끼기만을 꿈꾸던 그는 자신의 집안에 숨어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발견하고 서서히 변화한다.  
'조조래빗' 촬영 현장에서 왼쪽부터 주연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선전물을 찍었던 체코 프라하 외곽 촬영소에서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파시즘을 비웃는 코미디 영화를 찍고 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조조래빗' 촬영 현장에서 왼쪽부터 주연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와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선전물을 찍었던 체코 프라하 외곽 촬영소에서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파시즘을 비웃는 코미디 영화를 찍고 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아이의 천진한 시선에 녹여낸 2차 대전 풍광은 기존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 경쾌한 소동 끝에 비수 같은 비극도 녹여냈다.  
와이티티 감독이 2차 대전을 다룬 건 단편 ‘타마 투’(2005)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단편은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에 파병된 뉴질랜드 마오리 병사들의 얘기였다. 아버지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어머니는 아일랜드·스코틀랜드·영국 혈통의 유대계인 그는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파시즘이 빚은 이 광기의 역사는 “계속 이야기돼야 한다”고 했다. 
 

“왜냐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이고 사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많은 젊은 세대, 밀레니얼이 계속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트위터에 #FuckYouShitler(엿 먹어라 똥틀러)

상상 속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와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큰 사고를 치고 마는 장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상상 속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와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큰 사고를 치고 마는 장면.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촬영 장소로 실제 오래 전 독일 나치가 선전 영화를 만들었던 체코 프라하 외곽의 촬영소를 고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외계종족 코르그 역을 직접 맡는 등 배우로도 활동해온 그는 이번 영화의 각본·제작과 함께 조조의 상상 속 친구 히틀러 역도 겸했다.  
 

“폴리네시아계 유대인이 히틀러 역을 맡는 것보다 히틀러를 제대로 모욕하는 일이 있을까?” 

2년 전 이 ‘셀프 캐스팅’에 대해 자신의 트위터에 썼던 글이다. 당시 함께 남긴 해시태그가 이랬다. ‘#FuckYouShitler’, 엿 먹어라 똥틀러(똥(Shit)+히틀러(Hilter))쯤 될까.  
2018년 '조조 래빗' 촬영 당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트위터 캡처.

2018년 '조조 래빗' 촬영 당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트위터 캡처.

 
영화의 원작은 10년 전 그의 어머니가 권한 유럽 작가 크리스틴 뢰넨스의 소설 『갇힌 하늘』. 엄마가 유대인 소녀를 다락방에 숨겨준 사실을 알게 되는 히틀러 소년단 소속 소년의 이야기다. 여기에 상상의 친구, 코미디 요소를 보탰다.  
 
와이티티 감독은 “기존 2차 대전 영화들과 똑같은 스타일은 지루할 것 같았다”며 “어려운 주제로 대화를 시도할 땐 유머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유대인 뿔 났다고 배운 나치 아이들  

영화엔 조조와 상상 속 친구 히틀러의 비밀 작전, 나치 소년들의 오합지졸 군사훈련 등이 거대한 전쟁놀이처럼 펼쳐진다. “충성스럽게 살고, 죽음을 거부하고 싸우며, 웃으면서 죽는다!” 당시 히틀러 소년단의 실제 구호였다. 
 
조조는 폭탄 오발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고도 히틀러 소년단을 추종한다. 조조보다 소년단에 잘 적응하는 듯했던 친구 욜키(아치 예이츠)의 오동통한 볼에는 어느새 닳고 닳은 성인 병사 같은 피로감이 드리운다.  
 
조조의 집에 숨어 있던 엘사는 유대인이 뿔이 났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믿는 어린 조조에게 진실을 이야기한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엘사 역 토마신 맥켄지가 ’연기를 가르쳐주려고 지구에 온 외계인 같“았다고 호연에 감탄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조조의 집에 숨어 있던 엘사는 유대인이 뿔이 났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믿는 어린 조조에게 진실을 이야기한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엘사 역 토마신 맥켄지가 ’연기를 가르쳐주려고 지구에 온 외계인 같“았다고 호연에 감탄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와이티티 감독은 “아이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그 일부가 되기 위해 애썼는지 보여주려 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나치 사상을 주입받은 아이는 800만 명에 이른다.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나치 아이들은 유대인이 뿔이 났다고 믿었다.
 
‘외모로만 봐선 유대인과 독일인을 구분할 수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그게 영화의 포인트다. 누군가를 외모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짓이다. 또 우리가 어떤 집단에 모여 주입식 교육을 받는 게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갖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도 사상에 세뇌당하는 아이들 있죠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엄마 로지(왼쪽)는 나치에 심취한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쓴다.[AP=연합뉴스]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엄마 로지(왼쪽)는 나치에 심취한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쓴다.[AP=연합뉴스]

8살, 5살박이 두 딸이 있는 그는 “그 아이들은 순수함을 빼앗겼다. 부모가 나치를 나쁘게 말하면 밀고하라고, ‘너희들의 진정한 아버지는 히틀러다. 히틀러의 말을 무조건 들어라’고 배웠다”고 했다. 
 
“내 딸이 그 소년단에 들어가 내 말도 안 듣고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생판 남의 말만 듣는다면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면서 “사실상 똑같은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어른들의 사상에 세뇌당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넌 나치가 아니야 조조. 군복을 좋아하고 무리에 속하고 싶은 10살짜리 꼬마지.” 유대인 소녀 엘사가 조조에게 했던 대사였다.  
 

'엄마' 스칼렛 요한슨의 재발견 

1000대 1 경쟁을 뚫고 난생 처음 연기에 도전한 영국 소년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엉뚱한 감수성과 함께 베테랑 배우 뺨치는 집중력으로 조조 그 자체가 됐다.  
모자지간을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과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지난달 19일(현지 시간) LA 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조조 래빗'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자지간을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과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지난달 19일(현지 시간) LA 배우조합상 시상식에서 '조조 래빗'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엄마 로지 역의 스칼렛 요한슨도 감탄 난다. 러시아계 히어로 블랙 위도우 역으로 와이티티 감독과 함께 마블 시리즈 일원이기도 한 그는 올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론 여우주연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다. 
 
‘조조 래빗’에선 전장에 나간 남편 대신 아들 조조를 밝게 키우는 모습이 2차 대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빠(로베르토 베니니)와도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치를 선망하는 조조에게 현실의 참상을 똑똑히 보여주려 한다는 것. 예컨대 나치에 의해 광장에 목 매달린 선량한 사람들의 시신 같은 것들 말이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마블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촬영 당시 현장에서 주연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왼쪽부터)와 모니터를 보고 있다. 그는 마블 시리즈에서 블랙 위도우 역으로 활약해온 스칼렛 요한슨을 이번 영화 '조조 래빗'의 엄마 역에 캐스팅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마블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 촬영 당시 현장에서 주연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왼쪽부터)와 모니터를 보고 있다. 그는 마블 시리즈에서 블랙 위도우 역으로 활약해온 스칼렛 요한슨을 이번 영화 '조조 래빗'의 엄마 역에 캐스팅했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와이티티 감독은 “스칼렛 요한슨이 조조 앞에서 1인 2역하듯 말하는 장면을 좋아한다”면서 “실제 엄마이기도 한 그가 엄마 연기하는 걸 보고 싶었다(요한슨은 이혼한 남편과 6살 딸을 공동 양육하고 있다). 블랙 위도우가 그의 가장 흥미로운 역할은 아니다. 그보다 더 웃기고 재밌는 면모가 많다”고 했다.  
 
연출과 연기를 겸하며 힘들었던 점은.  
“그 동안은 내 영화에서 나한테 편한 역을 맡아 즐겨왔다. 하지만 이번엔 아주 중요한 배역이라 부담감이 컸다. 직접 쓴 히틀러 독백 대사도 까먹었다. 그렇게 힘든 대사를 써놓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연설 장면에만 NG를 25번 냈다.”
 

아이처럼 살면 세상 치유될 것

'조조 래빗'에서 조조의 눈에 장밋빛으로만 보였던 멋진 어른들은 서서히 각자의 사정과 연약함을 드러낸다. 코미디 속에 삶의 진실을 녹여내는 건 단편 시절부터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장기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조조 래빗'에서 조조의 눈에 장밋빛으로만 보였던 멋진 어른들은 서서히 각자의 사정과 연약함을 드러낸다. 코미디 속에 삶의 진실을 녹여내는 건 단편 시절부터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장기다.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그는 뉴질랜드에서 코미디언으로 경력을 출발했다. 2004년 단독 스탠드업 코미디 ‘타이카의 놀라운 쇼(Taika's Incredible Show)'로 전국 일주도 했다. 연출에 두각을 보인 건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하면서다. 2004년 도박장 앞 주차장에서 만난 세 아이의 대화를 엮은 단편 ’주차장 어페어‘는 아카데미 단편 작품상 후보,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단편영화상 등을 휩쓸었다. 
 
2010년 두 번째 장편 ’보이‘는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후보로 주목받았다. 1980년대 뉴질랜드 마오리 마을 소년에게 전쟁 무용담을 늘어놓는 허풍선이 아빠 역은 와이티티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
 
그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잃지 않으려 한다”면서 “60대나 70대가 꽃향기를 맡고 구름을 바라보고 어릴 때처럼 열성적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 어쩌면 그런 것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시 아이가 될 수 있다면 세상에는 문제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블 후속작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일본 만화 '아키라' 영화화에도 참여해왔지만 제작 일정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제3차 세계대전 이후 붕괴된 도쿄 무대의 가상 미래 이야기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일본 만화 '아키라' 영화화에도 참여해왔지만 제작 일정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제3차 세계대전 이후 붕괴된 도쿄 무대의 가상 미래 이야기다. [사진 삼지애니메이션]

차기작은 내년 개봉할 마블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다. 연출과 함께 코르그 역할도 다시 맡아 코미디를 뿜어낼 예정이다.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촬영하면서 스토리가 계속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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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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