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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 키우는 동안 나도 성장, 그건 해 본 사람만의 비밀

중앙일보 2020.02.03 15:00

[더,오래]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17)

 
은지는 3월을 손꼽아 기다린다. 목련이 피는 3월이면 은지는 병설 유치원에 간다. 간혹 학교 앞을 지날 때면 “엄마, 저기가 은지 유치원이죠?” 하고 반가워한다.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도 만나고, 재미있는 놀이도 할 거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다.
 
일곱 살이 된 은지는 요즘 들어 글씨도 또박또박 쓰고, 그림도 더 자세하게 그린다. 옷도 스스로 입고, 벽에 붙여 놓은 1부터 100까지의 숫자도 손으로 짚어가며 큰 소리로 읽는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그림 그리는 은지. [사진 배은희]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그림 그리는 은지. [사진 배은희]

 
참, 많이 컸다. 매일 보는 데도 그 성장이 눈에 띌 정도다. 기특해 박수를 마구 쳐주면 은지는 또 으쓱해 하며 더 큰 소리로 읽는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웃는다. 클수록 의사 표현도 정확한 은지다. 싫은 건 끝까지 싫고, 좋은 건 한 번에 OK다.
 
집에서는 나를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한다. 얼마 전엔 내가 빨랫감을 개고 있으니까 옆에서 수건을 같이 접어줬다. 차곡차곡 접은 수건은 조심조심 들고, 화장실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기까지 했다.
 
“와! 이거 은지가 했어? 대단한데? 박수!”
 
물개처럼 박수를 치고, 은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은지도 뿌듯한 표정으로 까르르 웃었다. 표정이 밝아서 더 예쁜 은지다. 자신감도 넘치고, 야무지기까지 하다. 은지는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 사람들은 생일을 축하하지 않고, 성장을 축하한다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저절로 찾아오는 생일보다는, 조금 더 성장한 걸 축하해 준다는 말이다.
 
은지가 화장실 앞에 놓아 둔 수건. [사진 배은희]

은지가 화장실 앞에 놓아 둔 수건. [사진 배은희]

 
나도 은지의 성장을 볼 때마다 축하해 주려고 한다.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뽀뽀를 해주기도 하고, 은지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거나, 놀이터에 나가 신나게 뛰어놀기도 한다. 변변찮은 축하에도 은지는 매번 활짝 웃는다.
 
나도 ‘성장’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보자는 마음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는데 만만치가 않다. 지도교수님은 첫 미팅 때 질적연구를 권유했다. 무지한 내가 과연 할 수 있을지 지금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 자리에선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냥 특수과제나 할까? 뭔 논문이야?’ 하다가, 우리 아이들이 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 최선을 다해보자’ 각오했다가, ‘포기할까?’ 고민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나의 성장을 위한 거니까. 내가 포기하면 우리 아이들이 내 모습을 볼 테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큰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나 당당한 은지. [사진 배은희]

언제나 당당한 은지. [사진 배은희]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을 펼쳤다. 조금 읽으려고 하면 은지가 옆에서 카드 게임을 하자고 하고, 똥 마렵다고 하고, 양치한다고 하고, 같이 놀자고 한다. 은지의 주문은 끝이 없다. 나는 다 들어주지 못한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읽어야 할 책도 많다. 은지는 내 상황을 파악했는지, 요즘은 내가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쓰고 있으면 내 옆에 와서 그림책을 펼친다.
 
몇 권의 그림책을 세워서 굴뚝처럼 만들었다가, 일렬로 늘어놨다가, 다시 흩어놓는다. 그러다 책 속의 주인공을 따라 그리고, 제목을 따라 쓰고, 책을 읽는다. 이젠 어려운 글씨도 거의 읽는 수준이 됐다.
 
“엄마, 팥죽할멈과 호랑이 읽어 줄까요?”
 
은지는 호랑이처럼, 할머니처럼, 그때그때 목소리를 바꿔가며 읽어준다. 그런 은지의 성장이 놀랍고 또 기대가 된다. 건강하고, 반듯하게, 이렇게만 자라줬으면….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알고, 고마워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줬으면….
 
한 생명을 키우는 일에는 비밀의 법칙이 있다. 내 시간과 노력,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어 키우는 동안 내가 성장한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성장’ 말이다. 이건 해본 사람만 아는 비밀 중의 비밀이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벌써 2월이다. 은지가 손꼽아 기다리는 3월도 머지않았다. 곧 유치원에 가겠지, 둘째 어진이도 대학에 가고, 나도 새 학기를 맞겠지. 우린 조금 더 바빠질 것 같다.
 
모두 새로운 환경에서 한 뼘씩 성장하길. 그렇게 살아가길.
 
*가정위탁제도란? 친부모의 사정으로 아동을 양육할 수 없는 경우, 일정기간 위탁가정에서 보호하고 양육하는 아동복지제도
 
위탁부모·시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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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희 배은희 위탁부모·시인 필진

[배은희의 색다른 동거] 제주도에 사는 시인. 낮엔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일하고, 밤엔 대학원에서 공부한다. 색다른 동거를 시작한 건 5년 전이다. 매너 있고 돈 많은 남자와 사는 게 아니라, 작고 여린 아기와 하는 동거다. 우린 동거인이면서 가족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위탁가족’이다. 우리의 색다른 동거가 ‘사랑’으로 전해지길 기도한다. 동거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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