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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

중앙일보 2020.02.03 00:13 종합 23면 지면보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10년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에서 부패한 검사 역을 맡았던 배우 류승범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라는 말을 한다.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공분을 샀지만, 이 대사는 공감을 얻으며 “호의를 계속 베풀면 ‘호갱’이 된다” 등 다양한 패러디를 낳았다. 영화 ‘다크나이트’(2008년)에서 조커는 “잘하는 게 있다면, 절대로 그냥 해주지 마라”는 조언을 했다.
 

북한 위협에 선의로만 대하는 건
한국 국익이나 생존에 도움 안 돼
대통령은 현실 직시한 정책 펴야

일상생활에서 무조건적인 호의는 위험할 수 있다. 상대방은 이를 당연한 거로 생각해 전혀 고마워하지 않은 채 무시하거나 악의로 갚을 수 있다. 개인 관계에서도 이러한 데 국가 관계에서 무조건적인 호의는 국가 생존마저 위협할 수 있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는 믿을 수 없는 상대와 게임을 하는 경우 ‘팃포탯’(tit for tat) 전략이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이 전략은 간단하다. ‘우선 협력한다(선의). 상대가 배반하면 배반한다(응징). 상대가 협력하면 다시 협력한다(관용).’ 모의실험 결과 이 전략은 다른 어떤 전략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다. 상식에 맞고 현실적인 팃포탯 전략은 실제 국가 간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전략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게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이다. 북한이 한국을 무시하고 위협해도 문 정부는 대화와 협력을 내세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 보고에서 북·미 비핵화 협상을 위해 잠정 중단했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시험을 재개할 수 있다며 2018년 6·12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핵무기 모라토리엄(유예)’의 파기를 사실상 선언했다.
 
서소문 포럼 2/3

서소문 포럼 2/3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일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의 답방을 위한 여건이 하루빨리 갖춰질 수 있도록 남과 북이 함께 노력해 나가길 바란다”며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노력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 관계 개선을 올해 국정 목표의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과 새 전략무기로 한국의 생존이 더욱 위태로워졌음에도 문 대통령이 남북 협력을 거론하자 “한국 대통령 맞냐”는 반응이 나왔다.
 
대통령 신년사 이후 정부는 대북 개별 방문 등 독자적 남북협력사업 추진 의지를 내세웠지만, 당사국인 북한과 동맹국인 미국 양쪽에서 모두 외면받고 있다. 북한은 한국에 금강산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하고,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미국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 선임연구위원은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굉장히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으며, 실수하고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제재를 완화하는 것은 나쁜 생각이며, 이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위협과 도발에도 남북 경협을 재개하겠다는 건 한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충수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지금 시점에서의 경협 추진은 제재를 허물고 북한의 자력갱생을 도와 비핵화가 실패할 가능성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했다(중앙일보 1월 29일자 31면). 반면 대북 제재는 북한을 비핵화 협상으로 끌어냈고,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가 가능하다고 제안할 만큼 효과가 입증됐다.
 
한국은 지금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북한 비핵화에 실패할 경우 한국은 핵보유국 북한의 위협에 시달리며 생존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현세대와 후손의 생존을 위해 총력을 다해 북한 비핵화에 나서야 한다. 이런 때에 대북 제재를 느슨하게 하고 남북 경협을 추진하는 건 북한만 이롭게 할 뿐 한국의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반대에도 남북 경협을 추진하다간 한·미동맹의 균열만 커질 뿐이다.
 
나심 탈레브 뉴욕대 교수는 저서 『스킨인더게임』에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다. 합리성은 파멸을 막고 생존을 도와주는 기능성으로 확인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최대 임무는 국가 생존을 돕는 것이다. 북한을 향한 무조건적인 선의는 국가 생존에 도움이 안 되는 만큼 북한의 위협과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처해 한국의 생존력을 높여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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