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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현실엔 리셋이 없다(Feat. WoW)

중앙일보 2020.02.03 00:09 종합 23면 지면보기
김준영 사회2팀 기자

김준영 사회2팀 기자

2005년 9월 13일 미국 게임 회사 블리자드의 다중접속온라인게임(MMORPG)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에선 ‘오염된 피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현상이 발생했다. 특정 던전(몬스터 소굴) 안에만 있어야 할 신종 바이러스(오염된 피)가 시스템 오류로 인해 ‘펫’(유저가 키우는 동물)을 매개로 외부로 유출됐고, 대역병으로 번져 유저 캐릭터 수천 명(영국 BBC 추산)이 죽은 사건이다.
 
불치(不治)의 전염병을 맞닥뜨린 전 세계 유저들은 제각기 ▶환자 치유 ▶미감염자의 안전 지역 유도 ▶가짜 약 판매 ▶바이러스 고의 전파 등 현실에 있음 직한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전염병 전파 과정과 사회 네트워크 반응이 실제와 유사해 의료계에서도 주목했고, 세계 3대 의학저널인 ‘랜싯’에도 관련 논문(2007)이 실렸다.
 
다만 부활이 있는 게임 특성상, 치사(致死)·죽음에 대한 경각심은 현실과 크게 다르다. 게임에서 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적으로 죽일 수도 있는 행위는 유희일 뿐 윤리적·법적 문제가 아니다. “WoW에서 죽는 것은 기껏해야 성가신 일일 뿐”(예일대 테러리즘 전문가 스튜어트 고틀리브)이라는 거다.
 
오염된 피 사건은 현실과 유사한 점이 상당하면서도, 전염병을 장난으로 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곳에서 전염병 전파는 양심의 가책 없는 하나의 놀이였다. 죽고 부활하면 병은 사라지지만, 던전에서 끊임없이 바이러스를 가져와 마을에 전파하는 유저들이 그랬다. 선량한 다수 유저의 전염병 퇴치 노력은 소수의 장난꾼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15년 전 일을 언급한 건, 신종 코로나를 게임 속 질병처럼 가벼이 여기는 일부 사람들을 보고서다. 모교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언론 사칭 기사를 뿌린 고등학생은 애교 수준이고, 유튜버들은 구독자를 모으기 위해 가짜 정보를 쏟아낸다. 대구 시내 한복판에선 감염자가 검역원을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거짓 쇼를 벌인 유튜버 몰카 소동도 있었다. 이들이 퍼뜨린 건, 어쩌면 진짜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공포와 혼란의 바이러스다.
 
WoW의 전염병 사태는 결국 블리자드의 서버 강제 리셋으로 막을 내렸다. 장난이 계속되는 한 조물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리셋은 그나마 게임이라 가능한 조치다. 알다시피, 현실엔 그런 버튼이 없으니 돌이킬 수 없는 짓은 애초에 하지 마시길.
 
김준영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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