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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 '수영장(La Piscine)'에 빠진 SW인재들

중앙일보 2020.02.01 10:00
350명의 학생이 한겨울 '수영장'에 빠졌다. 한 달 안에 수영하는 법을 깨우치지 못하면 아무리 더 놀고 싶어도 집에 가야 한다. 
 

학비 없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교육생 선발 현장 가보니

지난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미래 소프트웨어(SW)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이곳의 첫 프로그램 '42서울'의 최종 선발 이야기다. 44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차 테스트에 합격한 학생들은 '피시너(Pisciner)'라 불리며 1달간 집중교육과정(라 피신, 프랑스어로 수영장)'을 거친다. 최종 선발 예정자는 절반 정도. 이들만 세계 최고 수준의 SW 양성프로그램 '에꼴42' 교육과정(한국명칭 42서울)을 2년간 받는다. 하지만 20일 라 피신 입소 후 이튿날 첫 포기자가 발생했다. 지금까지 중도 포기생은 8명. 지난 1월 29일 서울 개포혁신파크에 자리한 이노베이션 아카데미를 찾아 현장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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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도, 신혼도 없다 

결혼한 지 두 달 된 우인준(28)씨는 아내에게 미안해했다. 신혼이 신혼같지 않아서다. 한때 고시를 준비했던 그는 '42서울' 후보교육생이 되며 다시 '고시생 모드'로 돌입했다. 인준씨가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시간은 하루 14시간 30분. 아침 9시부터 밤 11시 30분까지다. 하지만 그가 아카데미를 떠나는 순간에도 24시간 운영하는 이곳엔 십수 명이 남아 있다. '새벽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노베이션아카데미 '42서울' 후보생이 클러스터 공간에서 문제를 풀고 있다. 정원엽 기자

이노베이션아카데미 '42서울' 후보생이 클러스터 공간에서 문제를 풀고 있다. 정원엽 기자

인준씨는 간절하다. 스타트업에 다녔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결혼 직후 '42서울'의 후보 교육생이 된 이유다. 그는 "퇴사 후 소프트웨어 개발을 가르친다는 부트캠프 수업을 알아보니 4개월에 800만원 정도였다. 42서울은 지원금을 매달 100만원 받으며 공부한다. 삶을 유지하며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합격이)절실하다"고 말했다.

 
인준씨는 설 명절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결혼 후 첫 명절이었지만 양해를 구하고 설 당일 몇 시간만 큰집에 다녀왔다. 오후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에 머물렀다. 그는 "고3을 겪은 한국 학생이 많아서 그런지 '엉덩이 싸움'도 치열하다. 누군가가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좀체 자리에서 안 일어난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은 경쟁자이자 동료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정보를 주고 받으며 협력해야 한다. 그는 "지난 일주일 간 '혼자선 실패만 반복한다'는 걸 느꼈다. 모르는 건 동료에게 물어보고 빨리 흡수해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힘들지만 재미있다. 그는 "라 피신은 정식 교육과정이 아닌데도, 실전 같이 한다. 못 풀 것 같았던 과제를 풀어내며 내가 성장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인준씨는 '42서울' 합격생이 되면 데이터를 활용한 인공지능(AI) 개발을 공부할 계획이다.  
 

하루 16시간, 포기는 없다 

나경아(22)씨는 설 연휴 첫날이었던 24일 첫 시험을 놓쳤다. 시험에 대한 공지도 없었고 방법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날 문을 걷어차고 나가는 교육생도 있었다. 새벽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에꼴SF'를 경험한 선우문형(30) 조교가 첫 시험을 망쳤던 이야기를 대화방에 올리며 학생들을 위로했다.

 
대전에 사는 경아씨는 다른 동료 후보생들 3명과 함께 신논현에 집을 구했다. 대구, 청주, 경기도 남양주에서 온 동료들이다. 4명 모두 6시 30분이면 집을 나서 아카데미로 온다. 막차 시간까지 16시간을 공부한다. 그는 "경영학 전공을 하며 학교에 코딩 과정이 없어 답답했다. 비전공자도 창의적으로 배울 수 있는 '42서울'이 끌려 지원했다"고 했다. 그에겐 대학 졸업장 이상의 무기가 필요했다. 
 
이노베이션아카데미 코딩스튜디오에서는 동료들과 협업해서 문제 해결능력을 기른다. 정원엽 기자

이노베이션아카데미 코딩스튜디오에서는 동료들과 협업해서 문제 해결능력을 기른다. 정원엽 기자

최종 합격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도 있지만 아직은 버틸만하다. 동료들과 '절대 한숨 쉬지 말고 나쁜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규칙도 세웠다. 설날 깜짝 이벤트로 기분도 전환됐다. 경아씨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학장님이 사비로 신권 1000원짜리를 바꿔 세뱃돈을 주셨다"며 "첫 시험 이후 조금 의기소침했는데 분위기를 많이 반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이런 혁신적 교육을 하는 곳이 없다 보니 꼭 공부해 보고 싶다"며 "정식 과정에 입소하면 경영 전공과 개발 역량을 결합해 향후 금융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몰입의 즐거움'과 '스트레스' 사이 

'42서울'은 독특하다. 교수·교재·학비가 없는 3무(無).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교육과정이다.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프랑스의 SW 개발자 양성 프로그램 '에꼴42'와도 다르다. '에꼴42' 과정을 밟은 이동빈 조교는 "실리콘밸리, 리옹, 파리 캠퍼스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라며 "유기적인 커뮤니티로 발전해 나가다 보니 한국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개포디지털혁신파크에 자리한 이노베이션아카데미. 정원엽 기자

서울 개포디지털혁신파크에 자리한 이노베이션아카데미. 정원엽 기자

한국에선 끝까지 해보겠다는 의지가 해외보다 더 강하다. 이번 설 연휴에도 300여 명이 아카데미에 나왔다. '라 피신'이 '설 피신'이라는 농담도 나왔다. 명절에 "취업했냐"는 질문이 고역인 취준생들과 시댁을 찾아야 했던 여성 후보생들이 '설 피신'을 나왔다. 한수민 교육기획운영 매니저는 "라 피신은 줄 세우기가 아니라 과정이 나에게 맞는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라며 "합격 여부를 떠나 한 달의 몰입 경험이 개개인에게 큰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월~목 개인 과제, 금요일 시험, 주말은 팀플레이 

학생들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단계별 코딩 과제를 해결한다. 동료와 논의하거나 인터넷 등을 참고한다. 한가지 과제를 마치면 점수가 나온다. 0점을 받아도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도 있고, 90점이라도 '재시도'를 통해 문제를 다시 풀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은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여러번 '재시도'를 클릭한다.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코딩 스튜디오는 3개층 걸쳐 있으며 총 429석이 마련되어 있다. 정원엽 기자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코딩 스튜디오는 3개층 걸쳐 있으며 총 429석이 마련되어 있다. 정원엽 기자

금요일엔 시간 내에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시험을 본다. 시험 때는 인터넷 접속이 차단다. 주말에는 팀 과제다. 보통 3명이 한 팀이다. 시스템에 따라 무작위로 팀이 구성된다. 과제 결과는 멘토가 리뷰하고 조언을 해 준다. 강현숙 대외협력 팀장은 "라 피신 과정은 후보생에게 자세한 안내나 설명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규칙을 발견하고 문제를 찾고, 시험도 찾아서 풀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학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42서울'의 철학이다. 
 

네이버, 카카오 IT 공룡과 금융권에서도 기대

아직 선발 단계일 뿐인데도 '42서울' 교육생에 대한 업계 관심은 뜨겁다. 아카데미는 상근 멘토 10명 외에 비상근 멘토 50여 명을 둘 예정이다. 비상근 멘토는 기업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은 임원이나 전문 개발자들로 구성된다. 기업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고 한다. 멘토링을 통해 봐둔 소프트웨어 인재를 추후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관계자는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IT기업뿐 아니라 신한금융 등 금융권에서도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건물 내에 붙어 있는 각종 포스터들. 정원엽 기자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건물 내에 붙어 있는 각종 포스터들. 정원엽 기자

'42서울' 교육 후보생의 70%는 대학 전공이나 경력이 소프트웨어와 무관했던 사람들이다. 경제·경영, 인문학, 예술 등 분야도 다양하다. 이들이 '라 피신'을 통과하고 2년간 전문 교육을 마치면 SW개발 실력까지 갖추게 된다. 아카데미 측은 산업체와 공동프로젝트를 통해 실무 교육을 탄탄히 할 예정이다. 이민석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학장은 “지금은 학생들이 배우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며 "질문하는 법, 협력하는 법, 문제를 스스로 이해하고 동료들과 같이 해결하는 법, 현장에서 일하고 배우는 법을 경험해 인생의 필살기로 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원엽 기자 jung.wonyeo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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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옹달샘'과 '유튜브 스튜디오'가?
과거 일본인 외국인 학교 건물이었던 이노베이션 아카데미는 리노베이션을 거쳐 첨단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현관에는 입출입 시간을 기록하는 보안장비가 있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학생들은 주당 40시간 이상 공부해야 정부 지원금(주당 25만원, 4주 100만원)을 받는다. 하지만 학생들 대부분은 하루 평균 14시간~16시간, 주말까지 주당 100시간 이상을 공부하고 있다. 강 팀장은 "설날 당일에도 새벽 5시까지 학생들이 남아서 공부하는 걸 확인했다"며 "워낙 공부량이 많다 보니 옆 건물인 마루관에 남·녀를 구별해 8개~10개 정도씩 침대를 두고 간의 수면실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2층, 4층, 5층엔 '클러스터'라 불리는 교육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각 층별로 143석씩 총 429명이 교육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학생들은 아침에 오는 순서대로 편한 곳에 자리잡고 공부하면 된다. 2층의 경우 동료들과 논의를 해가며 코딩하는 학생들이 많고, 4층과 5층에는 조용히 집중하는 학생들이 자리잡는 편이다. 눈에 띈건 '옹달샘'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학생들이 잠깐 물을 마시고 쉬기 위해 마련된 공간에는 텀블러 수십개가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학생 개인자리에서 취식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휴식 공간에 텀블러들이 쌓인거다.  
학생들 사이에 '옹달샘'이라 불리는 음수공간. 정원엽 기자

학생들 사이에 '옹달샘'이라 불리는 음수공간. 정원엽 기자

 
유튜브 스튜디오도 2곳(1층, 2층)이 있다. 학생들의 영상 촬영 및 외부 SW커뮤니티들이 활용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생활코딩, 여성개발자 커뮤니티, 파이썬 개발자 그룹 등 다양한 커뮤니티가 자연스레 학생들과 어울리도록 설계했다. 학생들은 관심있는 커뮤니티와 소통하며 개발자로서 역량을 쌓을 수 있다 . 지하 1층엔 70석 규모의 '오픈스튜디오'가 있다. 개발 외에 인문학, 디자인 등 다양한 강의를 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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