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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에 "멍청이들!" 외쳤던 베토벤이 지금 음악을 만든다면

중앙일보 2020.01.31 14:09
'앙상블 블랭크'는 2015년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20세기 이후 음악을 주로 연주하고자 모였다. 사진은 30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의 공연 모습.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앙상블 블랭크'는 2015년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20세기 이후 음악을 주로 연주하고자 모였다. 사진은 30일 금호아트홀 연세에서의 공연 모습.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30일 오후 서울 연세대학교 내의 금호아트홀 연세. 제네바 국제 콩쿠르 우승자인 작곡가 최재혁(25)과 연주자들이 모인 ‘앙상블 블랭크’가 무대에 섰다. 이날 음악회의 주제는 올해 탄생 250주년이 된 작곡가 루드비히 판 베토벤. 하지만 2시간 동안의 연주 프로그램에 베토벤은 단 세 곡이었고 연주시간은 20분 남짓했다.

 
이들이 주로 연주한 건 20세기 이후에 나온 곡들이다. 베베른의 바가텔(1913년)부터 푸러의 피아노와 현악4중주를 위한 ‘자취’(1998년), 최재혁의 ‘셀프 인 마인드 Ⅳ’(2019년)까지 현대의 음악들이 연주됐다. 첼리스트는 앉는 대신 선 채로 악기를 두드리거나 쥐어 뜯었고(라헨만 ‘압력’), 서로 어울리지 않게 들리는 음들을 나열하고(베베른 바가텔), 잘게 쪼개지는 리듬을 많은 연주자가 찰나에 맞춰야했다(슈토크하우젠 ‘Dr.K’ 6중주). 200년 전의 베토벤 음악을 기대했다면 한참 빗나간 공연이었다.

 
앙상블 블랭크의 단원인 첼리스트 이호찬이 라헨만의 1970년 곡 '압력'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앙상블 블랭크의 단원인 첼리스트 이호찬이 라헨만의 1970년 곡 '압력'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앙상블 블랭크’의 기획 의도는 이렇다. ‘베토벤이 현대의 음악가라면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까.’ 이는 ‘18ㆍ19세기 사람들에게 베토벤은 이렇게 들렸을 것이다’로 바꿀 수도 있는 상상이다. 이날 현대의 청중은 음들의 질서가 파괴된 사이에서 방황하거나 난해한 리듬을 어렵게 쫓아가야했다.

 
이 젊은 연주자들은 위트 있게도 베토벤 말년의 작품 ‘대푸가’ 현악4중주를 초반에 배치했다. 베토벤의 이 작품은 당시의 출판사에게 즉시 거절당했던 음악이다. 연주자는 연주 하기가 어렵고, 청중은 들어도 아름답다 느끼지 못했다. 일관된 방향으로 추진되는 직설적 흐름, 네 대의 현악기가 맞춰야 하는 절뚝거리는 리듬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본래 다른 현악4중주의 마지막 악장으로 대푸가를 작곡했지만 출판사는 흥행이 안될 것을 알고 이 작품만 따로 떼어 출판하자 베토벤을 설득했다. 이렇게 대푸가가 빠진 현악4중주 초연에 베토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흥행 소식을 전해들은 베토벤은 청중에 대해 “짐승들! 멍청이들!”이라 욕설을 퍼부었다 전해진다.

 
이날 ‘앙상블 블랭크’ 연주자들은 베토벤의 이 전위적인 작품을 한층 현대적으로 연주했다. 네 현악기가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저돌적으로 자신의 리듬과 악상을 끌고 가 각 악기의 소리가 서로 겨루듯 충돌했다. 베토벤 말기 음악의 파괴적이고 괴팍한 성격이 강조됐다. 최재혁은 공연 중간에 나와 “오늘 청중 중에도 20세기 이후 음악이 아름답지 않다 생각할 수 있듯, 1820년대 베토벤의 대푸가도 그랬다”고 했다. 이들은 결국 사람들이 아름답다 여기는 것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베토벤의 해를 기념했다. ‘앙상블 블랭크’는 본래 20세기 이후의 현대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미국·독일·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모인 패기 넘치는 연주자들이다.

 
이날 프로그램의 마지막 연주곡은 베토벤의 작품번호가 없는 피아노 소품인 알레그레토와 안단테 풍의 알레그레토였다. 두번째 작품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지인이 찾아왔을 때 베토벤이 그의 딸을 위해 써준 곡이다. 베토벤의 작품번호가 붙은 곡은 138개지만 작품번호가 없는 것들이 400곡이 넘는다. 아픈 친구를 찾아가 즉흥으로 피아노곡을 쳐주거나, 친구와 그의 가족들을 위해 선물로 준 음악들이 다수 포함돼있다. 저돌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한 이날의 ‘젊은’ 베토벤 공연은 이렇게 작곡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며 막을 내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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