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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블랙리스트 파기환송…직권남용죄 문턱 높아졌다

중앙일보 2020.01.31 00:29 종합 1면 지면보기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에 이어 현 정부 인사들마저 겨냥하고 있는 검찰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 수사에 대해 대법원이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30일 ‘문체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법리오해 및 심리미진으로 일부 파기환송하며 직권남용 유죄 성립의 문턱을 높였다. 2018년 7월 블랙리스트 사건이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지 1년6개월 만이다.
 

김기춘·조윤선 혐의 일부 불인정
조국·양승태 재판에 영향 가능성

대법, 문체부 블랙리스트 판결
“진보단체에 지원금 배제는 유죄
청와대·문체부·예술단체 협의는
의무에 없는 일로 단정 못해”

조국,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관련
업무 지시라 주장…직권남용 부인

대법원은 이날 박근혜 정부 당시 진보 성향의 예술단체나 문화예술인을 정부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배제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로 기소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7명에 대한 재판에서 이들의 행위가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피고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들에게 지원 배제를 지시한 것은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비서실장, 정무수석, 교문수석, 문체부 장관 등의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뤄진 청와대와 문체부, 예술단체 간의 업무협의를 직권남용으로 판단한 원심은 파기했다. 
 

“상하기관 공무원끼리 업무협의, 직권남용으로 보기 어렵다”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판결을 위해 심판정으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판결을 위해 심판정으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직권남용죄를 규정한 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를 방해한 때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돼 있다. 즉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한 것에 더해, 하급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해야 범죄가 성립한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의 지시로 문화예술단체 직원들이 ‘지원 배제 방침이 관철될 때까지 사업진행 절차를 중단’하거나 ‘지원 배제를 위한 명분을 발굴한’ 행위 등 10여 가지에 대해선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모두 위원들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자율적 절차 진행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각종 명단 송부’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 보고’ 행위에 대해선 “해당 직원들이 종전에도 문체부에 업무 협조나 의견 교환 등의 차원에서 명단을 송부했는지와 법령 위반 여부 등을 심리했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는 ‘의무에 없는 일’은 구체적 법령에 근거해 판단해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했다.  
  
문체부 블랙리스트 1·2·3심 판단. 그래픽=신재민 기자

문체부 블랙리스트 1·2·3심 판단. 그래픽=신재민 기자

“공직사회 복지부동 우려 엄격히 해석”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대법원은 행정기관 내에서 상하기관과 감독기관, 피감독기관 사이의 지시와 업무 협의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남용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며 “직권남용죄가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을 초래했다는 우려를 반영해 적용 범위를 엄격히 해석한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이날 대법원의 판결이 직권남용죄로 기소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전·현직 정부 인사 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에 대해 “감찰무마가 아닌 특감반원에 대한 민정수석의 업무지시”라는 조 전 장관의 주장은 ‘행정부처 내 상하기관 간 업무지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직권남용이 성립되기 어렵다’는 이날 대법원의 판결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도덕적으론 비난받을 행위일 수는 있으나 ‘구체적 법령 위반’은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안의 중요성과 업무의 특수성 등에 따라 편차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해 5월 ‘직권남용 성립 요건’이란 논문을 발표했던 이완규 변호사(법무법인 동인)는 “조 전 장관의 경우 당시 감찰무마 과정이 다른 감찰 때와 얼마나 달랐는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구체적인 감찰 원칙이 무엇인지를 모두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결정으로 향후 파기환송심에선 김기춘 전 실장(징역 4년)과 조윤선 전 수석(징역 2년),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징역 2년) 등 피고인 7명의 감형 가능성도 점쳐진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이 청와대를 떠난 뒤에 이어진 지원금 배제 행위에도 책임이 있다는 원심판결 역시 파기환송했다. 퇴임 후에는 블랙리스트 업무에 책임을 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 사건의 경우 7명의 피고인이 업무상 상하관계로 얽혀 있는데 김 전 실장 등의 지시를 받았던 김소영(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신동철(징역 1년6월) 전 청와대 비서관의 경우 무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법원은 박 전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찍혔던 노태강 전 문체부 국장에게 사직을 강요했던 김종덕 전 장관과 박근혜 정부 초기 3명의 문체부 1급 공무원(최규학·김용삼·신용언)에게 사직을 요구했던 김기춘 전 실장 등의 직권남용 혐의는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조희대·박상옥 대법관, 무죄 취지 주장
 
이날 선고에서 조희대 대법관과 박상옥 대법관은 각각 별개의견을 통해 무죄 취지의 주장을 냈다.
 
조 대법관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현 정부 인사들이 청와대 캐비닛에서 발견한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을 특검에 제공한 행위를 지적했다. 조 대법관은 “해당 문건은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라면서 “이러한 청와대의 행위가 허용될 경우 정치적 보복을 위해 전임 정부에서 활동한 고위 공직자들을 처벌하는 데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박 대법관은 특정 성향의 예술단체에 지원을 배제한 행위에 대해 “모든 문화적 활동을 기계적으로 균등하게 지원해야 할 국가의 의무나 이에 대응하는 개인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반면 다수 의견 쪽에 선 박정화·민유숙·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은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조건 없는 재정적 지원’ ‘정치 지도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지원’ ‘경제적 지원에만 머물고 창작 행위와 내용에 간섭하지 않는 지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이 ‘문체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직권남용 기준 제시의 판결로 선택한 건 크게 세 가지 이유다. ▶사건 내에서 벌어지는 직권남용 행위와 양태가 다양하고 ▶단순 법령 위반을 넘어 문화적 기회의 균등과 사상의 자유란 헌법적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급부행정이란 국가의 역할과 상하관계로 이루어진 피고인 7명의 공범관계가 법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따져볼 게 상당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고위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사문화됐던 직권남용죄가 살아나며 검찰의 권력이 막강해진 측면이 있다”며 “이번에 ‘직권의 남용’과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의 의미와 기준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유죄 성립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 검찰의 무리수에 제동을 건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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