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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진 세상에서 5시간, 거기 한라산 은세계가…

중앙일보 2020.01.31 00:04 종합 20면 지면보기
한라산은 겨울에 더 아름다운 산이다.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정상부가 눈으로 덮여 있다. 산 아래 세상이 미세먼지로 자욱해도 산 위의 세상은 청정하다. 해종일 산행을 감내해야 이런 장관을 만끽할 수 있다.

한라산은 겨울에 더 아름다운 산이다.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정상부가 눈으로 덮여 있다. 산 아래 세상이 미세먼지로 자욱해도 산 위의 세상은 청정하다. 해종일 산행을 감내해야 이런 장관을 만끽할 수 있다.

겨울 한라산을 올랐다. 1년에 100만 명 가까이 입장하는 국민 관광지를 가봤다고 생색내는 건 아니다. 한라산의 겨울이 유난히 고운 걸 몰라서도 아니다. 2월 1일부터 한라산을 오르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뉴스를 현장에서 알리기 위해서다. 예약한 사람만, 그리고 제한된 인원만 한라산에 들 수 있다는 건 큰 뉴스다. 한라산은 지금보다 더 멀어져야 한다. 물론 인간으로부터다.
  

한겨울 성판악 눈꽃 산행
2월부터 탐방예약제 실시
가장 길고 붐비는 탐방로
정상 등정 인증서도 발부

한라산은 만원이다
 
눈 내린 한라산은 은세계였다.

눈 내린 한라산은 은세계였다.

한라산이 제주도를 낳았다. 제주도의 모든 자연유산이 한라산으로부터 말미암았다. 한라산의 가치는 그러나 지질학적 기원을 넘어선다. 제주도를 흔히 ‘유네스코 3관왕’이라 하는데, 이 영광 또한 한라산의 몫이다. 한라산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핵심지질명소다. 이 세 개 타이틀을 다 거머쥔 하나의 주인공이 한라산이다. 화산 하나가 유네스코 3관왕을 차지한 사례는 해외에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라산은 존재 자체가 고마운 자연유산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경외해야 할 대상이다. 하나 현실은 다르다. 풍진 세상의 인간이 ‘은하수를 끌어당길 만큼 높은 산(漢拏山)’을 너무 좋아한다. 최근 3년 한라산 국립공원 탐방객을 보자. 2017년 100만1437명, 2018년 89만1817명, 2019년 84만8279명. 최근 들어 감소 추세라지만, 한라산 탐방객은 연 100만 명 수준을 유지한다.
 
한라산 정상 직전 탐방로의 밧줄. 밧줄보다 두어 배 두꺼운 눈이 언 채로 달려 있었다.

한라산 정상 직전 탐방로의 밧줄. 밧줄보다 두어 배 두꺼운 눈이 언 채로 달려 있었다.

한라산 국립공원은 탐방로가 다섯 개 있다. 이 중에서 성판악 코스가 제일 붐빈다. 2017년부터 3년간 성판악 코스 탐방객 숫자를 열거한다. 35만3185명, 31만8310명, 29만4477명. 한라산 탐방객의 약 35%가 성판악을 길머리로 잡는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성판악 코스는 편도 9.6㎞ 길이다. 한라산 탐방로 중에서 제일 길다.
 
눈 덮인 백록담. 마침 구름이 가셨다.

눈 덮인 백록담. 마침 구름이 가셨다.

성판악 코스의 인기 비결은 분명하다. 성판악에서 올라야 백록담을 볼 수 있다. 한라산 탐방로 중에서 성판악·관음사 두 개 코스만 백록담 전망대까지 이어진다. 편도 8.7㎞의 관음사 코스는 성판악 코스보다 짧지만 험하다. 지난해 탐방객 수가 6만961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3개 코스(영실·어리목·돈내코)는 해발 1700m 지점에서 하산해야 한다.
 
탐방 예약제는 성판악·관음사 두 개 코스에서만 실시된다. 하루 정원은 성판악 1000명, 관음사 500명이다. 2월부터 한라산 정상은 하루 1500명에게만 허락된다는 뜻이다. 하루 1500명이면 1년에 54만7500명이다. 제한 기준이 헐거워 보인다. 한라산은 몰리는 날 몰리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일 성판악 코스 탐방객은 5411명을 기록했다. 2월 예약 현황을 보면 주말은 진즉에 100%를 채웠다. 주중 예약률은 70% 정도다. 한라산 국립공원은 예약 인원이 미달하면 탐방로 입구에서 현장 발권을 허락할 예정이다.
  
하얀 모자 쓴 구상나무 숲
 
1월 20일 오전 6시 20분. 해발 750m 성판악 탐방로 입구. 주차장은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겨울엔 오전 6시부터 입장이 가능한데, 다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유가 있다. 탐방로 입구에서 최소 3시간 걸리는 진달래밭 대피소를 정오 이전에 통과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한란산 탐방로

한란산 탐방로

오전 6시 40분. 랜턴 불빛에 의지해 산행을 시작했다. 짤그락 짤그락, 아이젠 소리가 깜깜한 숲에 퍼졌다. 성판악 코스는 왕복 19.2㎞ 길이다. 탐방 시간만 7시간 30분 걸린다. 성판악으로 올라 관음사로 내려가는 탐방객도 많지만, 원점 회귀 코스를 선택했다. 경사 급한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려면 무릎이 싱싱해야 한다.
 
한라산 안에는 매점이 없다. 모든 음식을 짊어지고 올라야 한다. 이태 전에도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팔았으나 지금은 뜨거운 물도 없다.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몇몇이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온병 커피를 나눠 마셨다.
 
구상나무에 핀 눈꽃. 눈사람 같다.

구상나무에 핀 눈꽃. 눈사람 같다.

운이 좋았다. 산 아래는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했는데, 해발 1700m 위 세상은 맑고 깨끗한 하늘이 펼쳐졌다. 한라산 설경은 역시 압권이었다. 특히 구상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 높은 구상나무는 사실 한국 특산식물이다. 우리가 종자에 무지했던 시절, 미국인 식물학자가 한라산의 구상나무 씨앗을 갖고 나갔다. 구상나무를 제주에선 ‘쿠살’이라고 한다. 쿠살은 성게의 제주 방언이다. 구상나무 잎이 성게 가시처럼 뾰족하다.
 
사진을 찍다 보니 5시간 만에 정상에 올랐다. 막상 정상에선 오래 머물지 못했다. 바람이 너무 셌다. 너나 할 것 없이 휘청거렸다. 눈 내린 백록담만은 가슴에 담았다. 하얀 백록담은 정말 하얀 사슴(백록)이 살 것처럼 경이로웠다.
 
겨우살이. 한라산 졸참나무는 겨우살이 밭이었다.

겨우살이. 한라산 졸참나무는 겨우살이 밭이었다.

하산길, 졸참나무 꼭대기의 겨우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에도 사는데 겨울에만 보인다. 하여 겨우살이다. 세상엔 맨몸을 드러내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성판악에는 다시 긴 줄이 늘어섰다.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받으려는 줄이었다. 정상 인증사진을 보여주면 1000원을 받고 인증서를 떼 줬다. 성판악지소 김광진 팀장에 따르면 이날 하루 성판악 탐방객은 1100여 명이었다. 한라산 탐방 예약은 인터넷과 전화로 가능하다.
 
제주도=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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