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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약 올리는 트럼프” 500억달러 생색 평화안 논란

중앙일보 2020.01.30 05:00
27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는 두 사람의 사진을 불태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얼굴 사진이었다. 이 시위가 있은 지 하루 지나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를 옆에 두고 ‘중동 평화안’을 공개했다.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발표를 하기 전부터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미국의 '중동 평화안’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27일 트럼프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EPA=연합뉴스]

미국의 '중동 평화안’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27일 트럼프 대통령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EPA=연합뉴스]

 
미국이 내놓은 ‘중동 평화안’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기존 이스라엘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했다. 대신 앞으로 4년간 이 곳에 추가 정착촌은 지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에는 동예루살렘 일부 지역을 수도로 국가를 설립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이 이를 수용하면 5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얼핏 보면 팔레스타인이 손해 보지 않을 제안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내에서 가자지구 통치권을 놓고 반목해온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이례적으로 정파를 넘어선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평화안에 대해 “알고 보면 팔레스타인을 약 올리는 안이다” “국제법과 협정을 위반했다”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에만 유리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팔레스타인은 왜 반발하나 

 
국제법상 요르단강 서안은 팔레스타인의 영토다. 1967년 유엔 안정보장이사회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점령했던 요르단강 서안을 팔레스타인에 돌려줘야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 유대인 약 40만명이 요르단강 서안에 불법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미국의 중동 평화안은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했다. 팔레스타인은 이 점에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정착한 요르단강 서안에서 내려다 본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로.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정착한 요르단강 서안에서 내려다 본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로. [로이터=연합뉴스]

 
더욱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등을 팔레스타인에 반환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의 국가로서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이라고 불린다. 이를 두고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란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협정을 맺고도 요르단강 서안에서 자국민을 철수시키지 않아 국제적인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평화안은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공인함으로써 국제법 위반이자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정면 도전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런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은 지난해 5월 미국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에서 “중동 평화안과 관련해 두 국가 해법이란 말을 쓰지 말자”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번 평화안의 설계자가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유대인인 쿠슈너 보좌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예루살렘 일부 지역을 수도로 해서 국가를 세우라”고 한 것도 팔레스타인의 분노를 키웠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지만, 국제법상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2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평화안을 발표하면서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수도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고 공언하면서, 팔레스타인을 향해선 동예루살렘 일부 지역을 수도로 삼으라는 앞뒤가 맞지 않은 해법을 내놓은 셈이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연구센터장은 “팔레스타인에게 동예루살렘은 이미 자신들의 영토인데, 미국이 이 영토의 일부를 수도로 나라를 세우라고 하는 건 ‘하나마나 한 얘기’ ‘놀리는 얘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 BBC는 이번 평화안에 대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모든 문제들을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평했다.  
 

중동 정세엔 어떤 영향

 
이번 중동 평화안을 팔레스타인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장지향 중동연구센터장은 “미국이 500억 달러 투자 얘기를 비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대놓고 했기 때문에 대외 이미지와 정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팔레스타인 수뇌부들이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중동에선 반발 조짐이 보이고 있다. 아랍연맹은 미국의 중동 평화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고 BBC가 28일 보도했다. 이날 AP통신에 따르면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이 평화안에 대한 대책을 논의할 긴급회의를 열 계획이다. 아바스 수반은 이번 회의에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 관계자들도 초청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남성이 커피숍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평화안 발표를 다룬 신문 기사를 읽고 있다 . [A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남성이 커피숍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평화안 발표를 다룬 신문 기사를 읽고 있다 . [AP=연합뉴스]

 
하마스의 수장인 이스마엘 하니예는 팔레스타인 모든 정파에 ‘중동 평화안’에 맞서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고 팔레스타인 관영 WAFA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하마스는 내전 끝에 2007년부터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다.  
 
미국과 큰 갈등을 겪고 있는 이란도 팔레스타인 편을 들고 나섰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의 고문인 헤사메딘 아세나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시온주의 정권과 미국간의 거래”라면서 “평화 계획이 아니라 강제와 제재 계획”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중동 평화안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위자가 타이어를 불태운 후 손가락으로 ‘V’ 표시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미국의 중동 평화안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위자가 타이어를 불태운 후 손가락으로 ‘V’ 표시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미국의 이번 발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무력 도발에 구실을 제공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마스는 무력 투쟁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한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하마스는 이번 평화안을 명분으로 테러를 벌이고, 이스라엘은 이에 보복하는 등 당분간 혼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동 정세에 미치는 파장이 약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국 관리는 “미국의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과 평화 협약을 맺은 이집트와 요르단은 이번 평화안을 전면 거부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AP통신에 전했다.  
 
정상률 교수는 “중동 국가들이 아랍의 이익보다는 점차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는 만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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