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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회계 다 바꿨다…다보스가 주목한 SK ‘사회적 가치’실험 10년

중앙일보 2020.01.27 14:45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이윤을 늘리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 1970년 뉴욕타임스 기고)  
 
지난 50년간 산업계를 지배해 온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저물고 있다. 지난 24일 막을 내린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의 핵심 화두도 새로운 모델, 즉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였다. 기업이 주주는 물론 직원과 소비자, 지역사회 등 기업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자를 아우르는 경영을 펼쳐 소득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 기후변화 같은 환경위기 등 주주자본주의가 낳은 부작용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다. 
 

SK, 사회적 가치 실천기업으로 초청 

최태원 SK회장이 23일 스위스 다보스 콩그레스센터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공식세션에서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최 회장, 로라 차 홍콩증권거래소회장, 코쿠부 후미야 일본 마루베니 회장,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사진 SK]

최태원 SK회장이 23일 스위스 다보스 콩그레스센터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공식세션에서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최 회장, 로라 차 홍콩증권거래소회장, 코쿠부 후미야 일본 마루베니 회장,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사진 SK]

 
자산총액 220조원에 육박하는 한국 재계 3위의 대기업이 막연한 개념이었던 사회적 가치를 시장의 언어인 ‘돈’으로 환산해 회계 장부를 만들고 있는 점에 올해 다보스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포럼 사흘째인 23일(현지시간) 열린 ‘아시아 시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세션의 패널로 참석해 SK의 사례와 시사점을 공유했다. 로라 차 홍콩증권거래소 회장, 일본 종합상사인 마루베니의 코쿠부 후미야 회장을 비롯해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불평등 연구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가 참석해 토론했다. 
 

최태원 “측정하지 않으면 말 잔치일 뿐” 

최태원 회장은 “기업가로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상당히 지지한다”며 현실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제가 생각하는 키워드는 ‘측정’입니다. 기업 입장에선 사회적 가치를 회계로 측정해야 평가를 할 수 있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위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농담이지만 안 그러면 ‘NATO(No Action Talk Only, 말만 있고 실천은 없다)’가 됩니다.”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많은 좌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SK는 2017년 기업의 정관을 수정해 ‘우리 기업은 관련된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또 2018년 재무제표에 당기순이익 등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기업이 만들어낸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성과로 표시하는 ‘더블 바텀 라인(Double Bottom Line)’ 시스템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어떤 제조기업이 오염물질을 줄이는 설비를 설치했을 경우, 기존엔 설비 구매를 비용으로 처리하지만, 더블 바텀 라인 회계에선 이 비용을 환경보호라는 가치 창출로 계산한다.
 

SK 계열사 영업익 1달러당 53센트 사회적 가치 

최태원(오른쪽) SK회장이 다보스포럼에서 SK의 사회적 가치 추구 활동을 전시한 라운지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SK]

최태원(오른쪽) SK회장이 다보스포럼에서 SK의 사회적 가치 추구 활동을 전시한 라운지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SK]

최 회장은 “2018년도에 SK 16개 계열사의 재무제표를 보니 영업이익 1달러당 53센트에 해당하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것을 확인했다”며 “장기적인 투자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변화를 찬성했다. 단기 투자자들은 주가에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성과를 계속 낸다면 큰 불평을 들을 것 같지는 않다”고 자신감을 비쳤다.
 

스티글리츠 “기업들 움직이게 하는 노력” 호평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에 대해 “대단히 흥미롭다. 실제 기업들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SK의 접근법은 기업이 환경적·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활동을 실제 했는지 확인할 수 있고, 나아가 재무적인 이익(경영성과)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스티글리츠 교수는 “기존의 주주 이익 극대화가 사회 전체의 복지로 이어지지 않는 만큼 기업들의 책임 이행을 의무화하는 강력한 법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최 회장은 “정부는 기업들에 징벌 제도(penalty system)를 도입하려 하지만 기업들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려면 ‘인센티브 시스템’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SK의 경우 2014년부터 220여개 파트너 기업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해  25%에 해당하는 금액을 현금으로 제공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인센티브 프로젝트의 효과가 증명되면 정부에도 이를 제안할 생각”이라고 했다.
 

최 회장 “AI는 잘 쓰면 좋은 망치”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에 따른 일자리 감소도 화두에 올랐다. 패널들은 “AI나 신기술로 인해 기존 일자리의 10%는 대체될 것이다. 새로운 고용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태원 회장은 ‘망치론’을 펼쳤다. “AI 기술은 일종의 도구(tool)이고 망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와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그는 “중요한 건 AI 기술 발전의 ‘방향성’인데 AI 스피커를 노인들의 대화 상대나 건강 체크 기기로 활용하듯 얼마든지 AI 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가치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2009년부터 줄기차게 사회적 가치를 강조해 왔다. 2012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함께 ‘사회적 기업가 MBA’ 과정을 개설하고 직접『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이란 책을 냈다. 최 회장은 2013년 다보스포럼에 패널로 참석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고 사회문제 개선과 참여를 유도하자”고 제안했고 7년 만에 패널로 참석한 올해 행사에서 “기업 경영의 목표를 주주에서 이해관계자로 바꾸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됐다”고 그간의 실험에 대해 확신을 드러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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