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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돌’ 황찬섭의 뒤집기, 모래판 르네상스 이끈다

중앙일보 2020.01.24 00:02 종합 16면 지면보기
'씨름돌'로 불리며 씨름 인기 부활에 앞장선 황찬섭. 근육량을 5kg 늘리기 위한 운동에 한창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씨름돌'로 불리며 씨름 인기 부활에 앞장선 황찬섭. 근육량을 5kg 늘리기 위한 운동에 한창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여전할래 역전할래’.

대학시절 영상 역주행 인기몰이
씨름 외면하던 젊은팬들 몰려
현란한 기술의 경량급이 중심
성인무대 2년차, 태백 꽃가마 꿈

 
‘씨름돌(씨름+아이돌)’로 불리며 주목 받는 차세대 씨름 스타 황찬섭(23ㆍ정읍단풍미인씨름단)이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 프로필에 써놓은 문구다.  
 
무명 씨름선수였던 그는 지난해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아니, 성공 당했다. 2년 전 대학(경남대) 시절 씨름 영상이 지난해 유튜브에서 ‘역주행(뒤늦게 인기를 끄는 현상)’한 덕분이다. ‘연예인보다 잘생긴 씨름선수가 있다’, ‘몸짱에 화려한 기술을 구사한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여성과 청년층이 황찬섭을 주목했다. ‘황찬섭 동영상’은 250만뷰 이상 기록했고, 레트로 열풍과 맞물려 씨름 인기가 되살아나는 과정에 촉매 역할을 했다.
 
황찬섭 경기 날 씨름장은 아이돌 콘서트장을 방불케 한다. 20대 여성 팬의 환호가 뜨겁다. 망원렌즈까지 동원해 그의 경기 장면을 찍는 팬도 많다. 20일 전북 정읍시 체육공원 내 씨름단 훈련장에서 만난 황찬섭은 "요즘 사나흘에 한 번 꼴로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한다"면서 "실력에 비해 과분한 인기를 누리는 것 같아 부담스럽지만, 씨름 인기에 한 몫을 보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응하고 있다"고 했다.  
 
'씨름돌'로 불리며 씨름 인기 부활에 앞장선 황찬섭. 프리랜서 장정필

'씨름돌'로 불리며 씨름 인기 부활에 앞장선 황찬섭. 프리랜서 장정필

 
황찬섭을 필두로 경량급인 태백급(80㎏ 이하)과 금강급(90㎏ 이하)에서 조각 같은 몸에 화려한 기술을 겸비한 ‘씨름돌’들이 속출했다. 백두급(140㎏ 이하)ㆍ한라급(105㎏ 이하) 등 중량급 선수들이 씨름 인기의 중심에 섰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보고 있었네’라는 네티즌 촌평은 젊어진 모래판 풍경을 재치있게 풍자한다.
 
최근 KBS의 씨름 예능 프로그램 ‘씨름의 희열’에서 황찬섭은 경기 도중 상대 선수의 샅바를 잡아채려다 찢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후 ‘모래판의 여진구’에 더해 ‘샅찢남(샅바 찢는 남자)’이라는 별명이 추가됐다. 황찬섭은 “샅찢남이라는 말이 발음하긴 어렵지만 뉘앙스가 맘에 든다”며 “보기엔 왜소하게 느껴지는데, 알고 보면 근육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며 활짝 웃었다.
 
뜨거운 인기 덕분에 ‘스카우트’도 경험했다. 전소속팀 인천연수구청을 떠나 정읍시청이 운영하는 단풍미인씨름단으로 적을 옮겼다. 김시영 정읍단풍미인씨름단 감독은 “황찬섭이 몰고 온 ‘씨름 열풍’이 씨름계 전체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나 다름 없다”면서 “스타 선수로서의 가치는 물론, 향후 성장 가능성까지 두루 고려해 경량급 최고 대우로 힘을 실어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씨름 기술의 꽃'으로 불리는 화려한 뒤집기 기술을 선보이는 황찬섭. 프리랜서 장정필

'씨름 기술의 꽃'으로 불리는 화려한 뒤집기 기술을 선보이는 황찬섭. 프리랜서 장정필

 
황찬섭은 “오직 씨름만 생각하고, 다른 모든 걸 버리겠다는 각오로 정읍에 건너왔다”면서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지내는 고향친구 (전)도언이와 함께 입단해 더 든든하다”고 했다. 금강장사 출신인 전도언은 ‘씨름의 희열’에도 황찬섭과 함께 출연 중이다.
 
어린 시절 황찬섭은 다양한 스포츠에서 주목을 받았다. 축구, 태권도, 검도 등 몸담은 종목마다 지도자로부터 “선수로 대성할 수 있으니 제대로 시작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씨름을 고른 건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경기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황찬섭은 “씨름부 숙소 앞에 컵라면과 각종 간식이 담긴 박스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씨름부 감독님께서 ‘씨름하면 맘대로 꺼내 먹을 수 있다’고 유혹하셨다”면서 “어린 나에겐 그 제안이 너무 달콤했다”며 웃었다. 이어 “운동 마치고 형들과 라면을 함께 먹곤 했는데, 정수기에 뜨거운 물이 다 떨어져 늘 미지근한 물에 라면을 불려(?) 먹으면서도 행복했다. 그때 그 라면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황찬섭은 자신의 성공 뿐만 아니라 씨름의 부활을 이끈다는 사명감으로 훈련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찬섭은 자신의 성공 뿐만 아니라 씨름의 부활을 이끈다는 사명감으로 훈련하고 있다. [연합뉴스]

 
‘씨름 레전드’ 이만기(57)를 배출한 명문 경남대에 진학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대학 2학년 때 씨름을 그만둔 적도 있다. ‘씨름의 미래’를 믿지 못해서다. 황찬섭은 “어느날 ‘씨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는데, 이걸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경량급 선수에게 미래가 있을까’ 싶었다. 고민을 시작하니 의욕이 싹 사라지더라”면서 “두 달간 씨름을 잊고 지냈다. 운동을 안 하는 여느 친구들처럼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보다가 감독님의 설득에 못이겨 모래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두 달의 휴식은 보약이 됐다. 3학년 진학을 앞둔 동계훈련에서 ‘죽기 직전까지 덤벼보자’는 각오로 운동에 매달렸고, 이듬해부터 대학 무대를 평정했다. 4학년 때는 ‘7관왕’이라는 입지전적인 이력을 완성했다. 황찬섭은 “2학년 때 마음을 다잡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애매한 선수로 남았을 것 같다”면서 “두 달 간의 짧은 일탈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했다.
 
 
황찬섭의 향후 과제는 인기 뿐만 아니라 경기력에서도 역전승을 거두는 것이다. 지난해 각종 대회에서 네 차례 4강에 올랐지만, 결승 무대를 밟아보진 못했다. “대학 시절 75㎏ 이하급에서 뛰었는데, 성인 씨름은 최저 체급이 80㎏이하급(태백)이라 체급을 올리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설명한 그는 “올해는 ‘태백장사’ 타이틀을 달아보는 게 목표다. 근육의 힘 뿐만 아니라 마음의 힘까지 차근차근 키워가고 있다”고 했다.
 
김시영 감독은 “태백급 선수들의 경우 평상시 체중을 85㎏ 정도로 유지하는데, (황)찬섭이는 아직 78㎏ 안팎”이라면서 “세밀하고 매끈한 근육에서 좀 더 큰 근육으로 체질을 바꾸는 과정에 있다. 달라진 체중에 적응을 마치면 특유의 화려한 뒤집기 기술을 앞세워 태백급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읍=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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