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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사업 아이디어 내라…靑 제안에 재계 "지금이 5공 때냐"

중앙일보 2020.01.22 18:11
 정부가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SK·LG·롯데 등 5대 그룹 관계자들을 불러 이들이 공동으로 사업화할 만한 아이디어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22일 재계에 따르면 5대그룹 부회장ㆍ사장급 임원들이 이런 요구에 따라 최근 서울 시내 모처에 모여 정부의 ‘공동 사업화’ 관련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결론은 내지 못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김상조 정책실장이 주도 

‘공동 사업화’ 과제는 김상조(58·사진) 대통령 정책실장이 주도한다는 후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5대 그룹 기업인들에게 제2의 반도체가 될 만한 신사업을 5대 그룹이 함께 찾고 공동 연구개발 및 투자를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정부도 이를 국책사업으로 삼아 수십조 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전해진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김 실장이 움직였다는 건 결국 청와대의 뜻이라는 의미"라며 "실질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기업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청와대는 이번 논란과 관련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회의실에서 열린 2020년 제1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회의실에서 열린 2020년 제1차 고위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동 사업화' 제안의 기본 취지는 헤매고 있는 바닥 경기에도 불을 지피고, 한국의 미래 먹거리도 내놓고 싶다는 것일 거다. 반도체만한 효자 아이템 하나만 만들어 낸다면, 문재인 정부는 경제 분야에서도 성공한 정부로 남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대기업의 협력이 필수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몰라도 너무 모른다. ‘공동 사업’이란 기업 생리에 맞지 않는다. 대기업들은 국내ㆍ외 시장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한다. 석유화학 산업만 봐도 그렇다. SK그룹과 롯데그룹, LG그룹은 석유화학 업계 1~3위 업체를 계열사로 거느린다.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는 '배터리' 시장과 관련해선 미국ㆍ한국에서 SK그룹과 LG그룹이 대규모 소송전 중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자사의 TV·건조기·가전제품과 관련해 자신의 제품이 우위라며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싶으면 과감하게 손을 잡는다. 삼성그룹이 석유화학과 방위산업 부문을 각각 롯데그룹과 한화그룹에 넘긴 일이 대표적이다.  
 
지난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재계 인사들이 참석해 있다.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정부 신년합동인사회에 재계 인사들이 참석해 있다.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재계 "5공 때가 떠오른다" 

제5공화국 당시인 1980년, 정부는 업체 간 과당 경쟁과 과다 설비를 지양한다는 이유를 들어 '산업 합리화 조치’를 추진했다. 당시 정부는 재계 회장들을 불러 강제로 사업 방향을 바꾸게 하고 자기 뜻대로 업체들을 이리저리 묶었다.
이젠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이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불려들어가 도장을 찍은 건 유명한 일화다. 그보다 전인 박정희 정부 땐 개별 기업의 사업 영역을 아예 정부가 정해줬다. 
박근혜 정부 때 경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한 ‘서별관회의’ 역시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이뤄졌던 것 아닌가. 
 
정부의 '공동 사업화' 과제를 두고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1960년대 국내에 이렇다 할 산업체가 없던 시절 당시의 정부주도 발전 모델로 회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대착오적"이라고 우려했다. 신 교수는 "정부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고 규제 혁신, 장기적 기초 연구 등에 힘쓰면 된다"며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역할에 대해 성찰부터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업 성과나 비용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물론 미국에서도 대통령이나 정부 관계자들이 기업인과 수시로 만나긴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실리콘밸리를 찾아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를 비롯한 IT업계의 거물들을 만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역시 툭하면 트위터로 자신의 친기업 성향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기업에 이런 사업을 하라"고 하진 않는다. 
 
금현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개별 기업에 다른 기업과 어떤 식으로 조정해서 일하라고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설령 공동 사업화 아이디어가 도출되더라도 누가 어떤 식으로 주도할 것이며, 그로부터 나타난 성과나 비용 등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문제도 있다"고 했다.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진정성까지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진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건 ‘지시하는 정부’가 아니라 ‘지원하고, 기다리는 정부’다. 그리고 정부의 역량은 이미 기업들에 신사업을 제안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중심의 정부는 영역별로 전문화된 기업을 따라잡는 것만도 버겁다. 
 
정말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차라리 이런저런 이유로 기업인들을 각종 행사장에 부르지 않는 건 어떨까.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싸우느라 이미 바쁘다. 그리고 사업을 공동으로 하건 말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어떻게 도와줄까만 궁리해야 한다. 
 
이수기ㆍ이소아 경제부문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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