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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자리에 ‘그분 자녀’…2년내내 구내식당 도장 찍더라

중앙일보 2020.01.22 00:05 경제 5면 지면보기
아모레퍼시픽

아모레퍼시픽

#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의 장녀 서민정(29)씨는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의 뷰티영업전략팀에서 일한다. 직급은 ‘프로페셔널’로 과장급 팀원이다. 2017년 1월 평사원으로 입사해 오산공장에서 근무하다 중국 유학을 마친 뒤 지난해 10월 재입사했다. 재입사 당시엔 과도한 관심을 우려해 직원들에게 ‘불필요하게 (뷰티영업전략팀) 부서에 가지 말라’는 구두 권고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관심은 잦아들었다. 익명을 요구한 이 회사 직원은 “처음엔 젊은 직원들 중심으로 그를 ‘셀럽’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고, ‘어떤 옷을 입었네’, ‘어떤 브랜드 가방을 들었네’ 등이 회자하곤 했지만, 이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리틀 오너’와 밀레니엄 직원들
허윤홍·이선호·서민정 사원 입사
낮은 직급부터 경험쌓는 오너 늘어
소탈하고 겸손하다는 평 많아
‘공정성과 규칙’ 중시 젊은 직원들
특별히 문제 안 삼고 “나나 챙기자”

서씨처럼 ‘평사원’으로 입사해 회사 생활을 시작하는 오너 3·4세들이 늘고 있다. 일반 직원 입장에선 ‘내 옆자리에 오너 일가가 앉아있는’ 셈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도 과거와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과거엔 ‘기획실 임원’으로 입사가 대세
 
과거엔 시작부터 달랐다. 19일 각 그룹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01년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은 1995년 전략기획실 이사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991년 SK상사 경영기획실 부장으로 입사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1995년 전략기획실 이사),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1997년 전략본부 부장) 등도 비슷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입사한 오너가 자녀들은 비교적 낮은 직급에서 시작한다. 구광모 ㈜LG 대표(대리),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대리), 이경후 CJ ENM 상무(대리), 이선호 CJ 제일제당 부장(사원), 허윤홍 GS건설 사장(사원) 등이 그랬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오너들이 자녀를 성장 주축으로 밀고 있는 계열사로 배치해 낮은 직급부터 경험시켜 능력 면에서 후계자로서 정당성을 갖도록 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구내식당, 커피숍 등서 줄 서는 리틀 오너도
 
낮은 직급에서 조직 생활을 시작하는 ‘리틀 오너’들은 대개 소탈하고 겸손하다는 평을 듣는다. 또래의 2030 세대 직원들이 공정성 이슈에 민감한 데다, 사회적으로도 기업에 사회적 책임과 상생을 요구하는 분위기라 ‘겸손한 경영자’의 모습을 보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CJ그룹

CJ그룹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녀인 이경후(35) 상무와 함께 CJ ENM 상암 사옥에 근무 중인 한 직원은 “한 번은 커피를 사려고 1층 투썸플레이스(커피전문점)에 줄을 서 있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이 상무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또 다른 ENM 직원은 “부장급 정도가 아니면 이 상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SK그룹

SK그룹

SK바이오팜에서 근무했던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큰딸 최윤정(31)씨는 2년여의 재직 기간 중 거의 매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직원과의 회식에도 빠진 적이 없고 차도 직접 몰고 다녔다. 이 회사 직원은 "처음엔 '서민 코스프레' 아닐까도 생각했는데 흐트러짐 없이 회사 생활을 잘 해서 좋아보였다”고 회상했다. 최씨는 현재 미국 유학 중이다.
 
스타트업 창업지원센터인 ‘마루180’에서 일하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녀인 정남이(37)씨도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자신이 운전하는 베라크루즈 차에 직원들을 태워 나르는 건 기본. 직원들 역시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한화그룹

한화그룹

‘리틀 오너’들과 일하는 젊은 직원들은 의외로 덤덤하다. 위화감도 없지만, 구태여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한화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A(33)씨에게 김승연 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사장에 관해 묻자 “신경을 아예 안 쓴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왕세자!’ 이렇게 떠받드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라고 했다. 다른 그룹사 직원들도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종신고용이 무너진 현재 세태가 일정 부분 반영된 영향도 있다. 이경묵 교수는 “더는 종신고용이나 평생직장이 적용되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더 좋은 조건이라면 다른 회사로 얼마든지 옮겨갈 생각이 있는 젊은 직원들은 회사에 로열티도 높지 않고 ‘리틀 오너’라고 충성하거나 줄을 설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5배 고속 승진? “어차피 물려받을 건데…”
 
과거보다 권위 의식은 줄었다 해도 오너 자녀들은 여전히 입시로 치면 ‘특례생’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상위 30대 그룹 중 오너 일가의 자녀 세대가 경영에 참여 중인 21개 그룹을 조사한 결과 오너 3·4세대는 평균 입사 4년 6개월 만에 임원을 달았다. 일반 대기업 직원들이 임원이 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평균 24년인 것을 고려하면 5배 이상 빠르다.
 
분통을 터뜨릴 만도 하지만 젊은 직원들의 반응은 ‘회사만 잘 되면 상관없다’였다. 김승이(가명·36)씨는 “(오너들의 빠른 승진에) 거부감은 있다”면서도 “하지만 어차피 그 사람들이 (회사를) 물려받을 건데 사원에서 대리 3~4년, 대리에서 과장 3~5년 이걸 다 똑같이 채우고 가는 것도 비효율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유통 대기업 2년 차인 B씨는 좀 더 쿨하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대에 사장이나 오너보다 직원이 속 편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분들은 외국에서 엘리트 교육도 다 받았으니 빠르게 승진해서 속성으로 배운 뒤 회사를 잘 운영한다면 본인한테나 저희한테나 좋은 일 아니에요?”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는 ‘공정성과 규칙’에 누구보다 민감하지만, 대기업 오너처럼 ‘너무 잘 타고난 이들’에 대해서는 그 규칙이 ‘그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이고 나는 나’란 룰로 바뀌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딱 벽을 놓고 그걸 넘어서려고도, 특별히 문제로 삼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이어 “밀레니얼 직장인들의 이런 태도는 현실 속에서 합리적인 접점을 찾고 나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성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소아·강기헌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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