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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세대출 규제, 집값 잡으려다 전세 불안 부를라

중앙일보 2020.01.21 00:22 종합 30면 지면보기
약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기 쉽다. 강해지는 약은 부작용도 커진다. 최근 정부가 잇따라 내놓는 부동산 대책이 그런 꼴이다. 무조건 집값을 잡겠다는 무리수에 시장은 요동치고 실수요자들은 골탕을 먹는다. 어제부터 시가 9억원 이상 주택 소유자에 대한 전세대출 억제가 시작됐다. 전세대출자가 고가 주택을 매입한 사실이 적발되면 대출 회수에 나서고, 상환이 늦어질 경우 곧바로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불이익을 주는 고강도 처방이다. 아파트 투기의 온상이 된 ‘갭 투자’를 봉쇄한다는 목적이다. 하지만 시중에서는 이미 실수요자 중심으로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대출 막히면서 반전세·월세 전환 늘어
실수요자 피해 최소화 방안 보완해야

특히 시가 9억원 주택을 보유하면서 교육 등의 이유로 다른 곳에 전세를 사는 사람들이 난감해졌다. 만일 집주인이 전세금 인상을 요구할 경우, 인상 요구분을 월세로 돌리는 고육지책을 써야 할 판이다. 집주인이 퇴거를 요구할 경우, 인근의 비슷한 수준의 전세로 가는 것도 힘들어졌다. 기존 대출자라 하더라도 전셋집을 옮기면 대출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증액 없는 전세대출에 대해선 3개월 유예 기간을 뒀으나, 그 이후 실수요자가 겪을 혼란은 불 보듯 뻔하다. 전세대출이 어렵다 보니 서울 강남 일부 단지에서는 전세 대신 반전세나 월세 물건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전세대출을 받기 힘들어진 세입자는 자신이 보유한 주택의 전세금을 올려 보충하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전셋값 인상이 서울 전역 혹은 수도권 일대로 도미노처럼 번질 가능성도 있다. 가뜩이나 지금 서울 아파트 전세는 사상 최고 수준이다. 고가 주택 대출 규제, 민간주택 분양가 상한제 등 규제의 불똥이 전세 시장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은 이미 9억원에 육박해 전세대출 규제 대상도 크게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른 규제는 전세 시장 및 주거 안정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도 무리한 규제의 부작용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집값 잡기라는 지상 과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자세다. 그러나 ‘못 견디겠거든 집을 팔아라’식의 둔탁한 규제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위에서 정책을 세우면 아래에선 대책이 나온다. 전세대금 대출이 막히면 전세 시장은 반전세 또는 월세로 바뀌고, 실수요자들은 주택담보 대신 신용대출 등 대안을 찾는다. 이를 막는답시고 더 강한 규제를 만들수록 시장은 왜곡된다. 실수요자 피해가 없도록 정교한 대책이 보완돼야 한다. 무엇보다 공급 확대라는 정공법을 도외시한 규제 일변도 정책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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