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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수영 시작하고 작심삼일! 남 좋은 일 많이 하셨네요

중앙일보 2020.01.20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62) 

 
수영장, 헬스클럽, 외국어학원 어디든 해마다 이맘때면 사람이 붐빈다. 몸속에 뭔가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는 생체시계가 작동하는가 보다. [사진 Pixabay]

수영장, 헬스클럽, 외국어학원 어디든 해마다 이맘때면 사람이 붐빈다. 몸속에 뭔가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는 생체시계가 작동하는가 보다. [사진 Pixabay]

 
어느 해였던가, 한동안 쉬던 수영을 다시 해보려고 수영장을 찾았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 보통 한 레인에 너덧 명, 익숙한 사람들은 서로 방해되지 않게 오갈 수 있으니 여덟 명까지도 괜찮은데 레인당 열 명이 훨씬 넘었다.
 
‘아, 맞다. 1월이지!’ 대부분 오랜만에 왔거나 초보자라 한두 번 돌곤 힘들어 가장자리에서 쉬고 있다. 어린 시절 명절 전날의 대중탕이 떠올랐다.
 
수영장, 헬스클럽, 외국어학원, 심지어 새벽 등산로까지…. 해마다 이맘때는 어디든 붐빈다. 몸속에 뭔가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는 생체시계가 작동하는가 보다. 새해의 희망과 계획을 품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부지런히 몰려드는 그 대열에 나도 번번이 동참해보았다.
 
그러다가 1월 하순 정도 되면 슬슬 긴장은 풀리고 피로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1월 1일을 기점으로 의욕적인 목표는 세웠지만 생활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술자리와 야근으로 저녁 강좌나 새벽 강좌를 한두 번씩 빠지다 보면 결국 흐지부지되곤 했다.
 
예전에 골프연습장 사장님은 그렇게 안 오는 사람들 덕분에 먹고 산다고 했다. “그 많은 사람이 전부 한 번씩 자세 봐달라고 해봐요? 제가 어떻게 다 봐줘요? 못 먹고 살아요.” 어쩐지 3개월 등록한 후 밥 먹듯 결석하다가 재등록하러 갔을 때, “많이 못 나오셨죠?” 하며 인심 좋게 4개월을 끊어주더라니….
 
중도 포기자 덕분에 운영자뿐 아니라 성실한 출석자도 더 큰 이익을 얻는다. 외국어학원의 2월 분위기는 와글와글하던 1월과 확연히 다르다. 수영강습도 1월의 혼잡만 참아내면 2~3월 정도부터는 강사 한 명에 수강생 너덧 명, 서로 친해져 진도 쑥쑥 나간다. ‘꾸준한 자’의 특권이다.
 
평소에는 할인쿠폰, 포인트 적립, 배송비 무료 같은 자잘한 것에 신경 쓰면서 회당 1만원 넘는 강좌를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통 큰’ 일이다. 대학 시절에 ‘땡땡이’ 치다가 “강의 한 시간 단가가 3천원”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바뀐 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공기’나 ‘물’처럼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배움’에 대해서는 원가의식이 희박한 것 같다.
 
정초의 모든 결심은 생활 속의 작지 않은 '혁명'이다. '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게 아니라 먼저 먼바다를 꿈 꾸게 하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혁명은 뚜렷한 지향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Pixabay]

정초의 모든 결심은 생활 속의 작지 않은 '혁명'이다. '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게 아니라 먼저 먼바다를 꿈 꾸게 하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혁명은 뚜렷한 지향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Pixabay]

 
하긴, 금연, 금주, 다이어트도, 아침 식사를 거르지 않겠다는 결심도 그렇다. 그렇게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는 것은 큰 목표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정초의 모든 결심은 생활 속의 작지 않은 ‘혁명’이다. ‘배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줄 게 아니라 먼저 먼바다를 꿈꾸게 하라’는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혁명은 뚜렷한 지향점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루 담배 한 갑이면 1년에 160만원, 그걸로 해외여행하자’는 식의 가벼운 금연결심보다는 도저히 비교 불가능한 가치 즉, ‘사랑하는 아이가 대학 졸업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 내가 건강하게 돈 벌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큰 ‘혁명적 비전’ 없이, 연초에 남들이 다 하니까 나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슬그머니 등록하곤 했던 새벽 영어학원, 결국 내 내면에 잠자던 배움의 본능이 화산처럼 분출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20년 새해에는 어떻게 살까? 지난 12월에 잠깐 슬럼프에 빠졌었다. 매일 평온하게 잘 놀고 지내는 사람이 무슨 슬럼프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럴수록 안팎의 컨디션에 더 민감해진다. 회사에 다닌다면 조금 우울하거나 힘들 때도 어떤 사이클과 외부 압력에 이끌리거나 휩쓸려 금세 지나가곤 하지만 스스로 생활을 통제하다 보면 우연히 휩싸인 기분에도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여튼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까?’ 생각하다가 끄적여봤다.
 
무엇을 할 것인가?
좋은 것을 해야 한다.
인생이 아깝지 않아야 한다.
내가 행복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행복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새해 목표이자 신년사가 되었다. 남이 어떻게 살든 내가 이렇게 살면 되겠지.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신년 덕담을 남에게만 할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사진 Pixabay]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행복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새해 목표이자 신년사가 되었다. 남이 어떻게 살든 내가 이렇게 살면 되겠지.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신년 덕담을 남에게만 할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사진 Pixabay]

 
별것 아닌 말이지만 낙서치곤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다 잊어버렸고 첫 줄과 끝줄,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행복해야 한다’라는 문답만 기억났다. 며칠 전에 청소하면서 그 메모지를 찾았다. 역시 ‘내 행복’이 ‘좋은 것’와 ‘인생이 아깝지 않을만한 것’보다 더 절실하고 포괄적인 메시지라 기억났던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새해 목표이자 신년사가 되었다. 잘하면 평생의 생활지침이 될 수도 있겠다. 그동안 가끔 명치 끝이 답답한 기분이 들 때면 주변에 물어보고 싶었다. 은퇴해서 오롯이 자기 시간을 갖고 살면서도 나를 위해 살지 못하고 길들여진 습관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는가. ‘책임’이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옥죄며 힘들어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제 물어볼 필요 없다. 이렇게 정해놓았으니 남이 어떻게 살든 내가 이렇게 살면 되겠지. 건강하고 행복하라는 신년 덕담을 남에게만 할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1월은 참 좋다. 연말이면 습관적으로 “한 살 더 먹네”하고 한탄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신년에까지 상실감을 지속시키는 사람은 없다. 1월이라 ‘전환’할 계기가 되고 게다가 마침 봄도 눈앞에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올해부터 다시 수영을 시작하려고 한다. 지난 12월도 똑같은 시간이었지만 새 달력의 첫 장을 부욱! 뜯는 ‘계기’와 ‘파이팅!’으로 스스로 힘을 북돋워 주려고 한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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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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