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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창고 ‘문화 아이콘’ 만든 청년을 사표 쓰게 한 황당 사연

중앙일보 2020.01.20 05:00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문화예술촌을 상공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일제 강점기 지어진 양곡창고를 완주군이 40억원을 들여 2013년 6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문화예술촌을 상공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일제 강점기 지어진 양곡창고를 완주군이 40억원을 들여 2013년 6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는 '삼례문화예술촌'이 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양곡창고를 완주군이 40억원을 들여 2013년 6월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민 곳이다. 쓰레기가 나뒹굴던 허름한 창고가 책공방·목공소 등 7개 문화시설로 탈바꿈하면서 전국에서 사람이 몰리는 관광 명소가 됐다.
 

[이슈추적]
전북 완주 삼례문화예술촌 '고용 갈등'
수탁기관, 예고 없이 '계약 만료' 통보
김진섭 책공방 대표 "갑질" 공개 반발
완주군 "양측 개입 권한 없다" 선 그어
논란 커지자 "책공방 직접 채용" 중재
30대 직원, 작년 말 퇴사하며 일단락
"자리보전 오해 벗고자…상식 지키길"

삼례문화예술촌 내 책공방북아트센터(이하 책공방) 김진섭(54) 대표와 그와 7년간 손발을 맞춰 온 제자 이모(35·여)씨는 예술촌을 '문화의 아이콘'으로 키운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책공방은 누구나 책 만드는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첫해부터 책공방을 운영해 온 김 대표는 책 만드는 장인(匠人)이다. 그가 출간한 『책기계 수집기』는 지난해 11월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을 받았다. 이씨도 『책공방, 삼례의 기록』으로 2017년 한국출판평론상 우수상을 받은 출판기획 전문가다.
 
"비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삼례문화예술촌을 떠나려 합니다."
 
이씨가 지난해 마지막 날 본인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책공방에 남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퇴사를 결심한 까닭은 뭘까.
 
책공방북아트센터에서 김진섭 대표가 강의하고 있다. [사진 책공방]

책공방북아트센터에서 김진섭 대표가 강의하고 있다. [사진 책공방]

이씨는 지난해 11월 삼례문화예술촌 운영을 맡은 아트네트웍스로부터 아무 예고도 없이 '계약 만료' 통보를 받았다. 이에 스승인 김 대표는 "삼례문화예술촌 수탁업체가 책공방 제자에게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e메일로) 보내 왔다"며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2013년 책공방에 입사한 이씨는 민간위탁 특성상 매년 1년 단위로 근로 계약을 갱신해 왔다. 그러나 2018년 1월 예술촌을 운영하는 수탁기관이 애초 삼삼예예미미협동조합에서 아트네트웍스로 바뀌면서 고용 갈등이 시작됐다.
 
삼례문화예술촌은 문화시설마다 대표(관장)가 있지만, 완주군이 한시적으로 운영을 맡긴 수탁기관이 직원 임면권을 갖는 구조다. 아트네트웍스의 계약 기간은 3년이고, 완주군은 아트네트웍스에 매년 5억원~6억3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해 12월 초 지인들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제자는 (근로) 계약 기간에 대해 책공방 운영에 따른 자동 갱신을 요구했고, 아트네트웍스 대표로부터 '(2020년 12월 31일까지) 책공방이 있는 동안 자동으로 연장될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지만, 계약 기간을 30일 남긴 2019년 11월 30일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책공방에는 직원 한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러면 일 잘하고, 전문성 있고, 7년이란 노동 행위를 (나와) 똑같이 해온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는 게 상식"이라며 "3년짜리 수탁자가 애먼 직원을 자르라고 압박하는 건 갑질"이라고 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문화예술촌. 일제 강점기 지어진 양곡창고를 완주군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몄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문화예술촌. 일제 강점기 지어진 양곡창고를 완주군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꾸몄다. 프리랜서 장정필

반면 아트네트웍스 측은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심가희(61) 아트네트웍스 대표는 "(근무 기간이) 2년 넘어가면 정직원이 된다고 해서 예술촌 내 문화시설 직원 대부분을 2년이 되기 전 교체했다"며 "왜 책공방만 이를 거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수탁기관이 직원 채용을 포함한 예술촌 전체 운영 권한을 행사하는 건 당연하다"는 취지다.
 
앞서 심 대표는 책공방에서 이씨를 직접 채용하고, 완주군이 인건비를 아트네트웍스를 통해 주는 방식을 제안했다. 당초 완주군은 "재위탁 문제가 발생한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논란이 커지자 "예산 분리는 재위탁이 아니다"고 태도를 바꿨다. 김 대표도 제자를 지키기 위해 완주군이 내놓은 중재안을 받아들여 지난달 31일 협약서를 작성했다.
 
정작 이씨는 "어떤 말도 믿을 수 없다"며 퇴사를 택했다. 이씨가 "기간제법에 따르면 삼례문화예술촌은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경우'에 해당돼 근무 기간이 2년을 넘겨도 기간제 근로자가 정규직이 되지 않는다"고 호소했지만, 심 대표는 근로 계약 체결 당시 "책공방이 있는 동안에는 자동으로 근로 계약이 연장될 것"이라는 구두 약속을 뒤집어서다.  
 
책공방 내부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책공방 내부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이씨는 "당시 '책임을 지겠다'는 완주군 담당자는 다른 부서로 떠났고, 현재 담당자는 '아트네트웍스와 저와의 일이라 완주군은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며 "아트네트웍스가 말을 번복해 책공방에 예산을 주지 않을 경우 제가 선생님을 상대로 월급을 청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제 편을 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무엇이 상식인지 판단해 달라'고 했지만, 완주군은 방관했다"며 "한 간부는 '이 일로 인해 삼례문화예술촌은 물론 완주군의 이미지가 실추됐다'고 말해 황당했다"고 했다.
 
이씨는 본인을 '완주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일각에서는 "책공방에는 완주 출신이 아무도 없지 않느냐"며 문제 자체를 외면했다고 한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전주대를 나온 그는 "제가 엄밀히 완주 사람은 아니더라도 완주에서 상식에 반하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지역에서는 공감을 많이 얻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얼마 전 민간위탁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부 가이드라인이 나왔다"며 "저처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례가 많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어서 '제가 당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긍정적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5일 약 20만명에 달하는 공공 부문 민간위탁 노동자들의 고용 유지 및 승계를 최대한 보장하는 '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수탁업체가 근로 계약 기간을 정할 때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공공기관의 업무 수탁 기간과 같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수탁 기간은 2년 이상을 원칙으로 하고, 수탁업체가 가이드라인을 어길 경우 공공기관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이씨는 "제게 특별 대우를 해달라는 게 아니라 법과 약속을 지켜달라는 요구였다"며 "약속을 못 지키면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게 상식인데 (아트네트웍스는) 이것을 무시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더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단순히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오해를 벗고 싶었다"고 했다.
 
책공방북아트센터 김진섭 대표가 출간한 『책기계 수집기』. 지난해 11월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을 받았다. [사진 책공방]
책공방북아트센터 김진섭 대표가 출간한 『책기계 수집기』. 지난해 11월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을 받았다. [사진 책공방]
책공방에서 7년간 출판기획 전문가로 일해 온 이모(35·여)씨가 지난해 아트네트웍스 측과 작성한 근로계약서 일부. [사진 이씨]
책공방에서 7년간 출판기획 전문가로 일해 온 이모(35·여)씨가 지난해 아트네트웍스 측과 작성한 근로계약서 일부. [사진 이씨]
김 대표는 지난 3일 책공방 페이스북을 통해 이씨의 퇴사 소식을 전했다. 그는 "문화의 중심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행복해야 문화가 꽃필 수 있다. 이것이 상식이라 생각했고, 그 사실을 알렸으나 저의 능력이 부족해 제자의 해고를 막지 못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완주군도 난감한 처지다. 완주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책공방은 애초 독자적으로 운영돼 왔기 때문에 수탁자도 이를 존중해 줘야 갈등이 안 생긴다"며 "군에서는 삼례문화예술촌의 직원 채용과 운영 권한을 수탁자인 아트네트웍스에 맡기고 예산만 지원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트네트웍스와 책공방이 (채용 방식에) 합의를 안 하면 예술촌 자체를 운영하지 못하는데, 다행히 연말에 양측이 합의해 금년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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