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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법 1년···"저러니 택배나 배달하지" 또 들려왔다

중앙일보 2020.01.17 15:26
[중앙포토]

[중앙포토]

10여년간 택배기사로 일했던 이호권씨는 근무하면서 고객으로부터 각종 욕설과 폭언에 시달려 우울증이 생겼다. “저러니 택배나 배달하지”라는 말은 오히려 웃어넘길 수준이었다. 택배기사를 그만둔 지금도 낯선 전화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직업병이 생긴 것이다.
 

감정노동 '을(乙)'의 설움
740만명이 감정노동 추산
승무원부터 교사, 사회복지사까지

서울교통공사 고객센터 상담사 최순애씨에게도 잊히지 않는 폭언이 있다. “어릴 때 공부 못했죠? 그러니까 거기서 나한테 욕먹고 있는 거예요. 좀 똑똑했어봐. 진작 다른 데 가서 폼나게 일하지.” 최대한 고객을 달래며 상담을 마무리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생채기가 남아있다.
 
백화점 판매원으로 10년 넘게 근무했던 김시영씨도 마찬가지다. 김씨를 위아래로 훑으며 조롱하거나 막무가내로 인신공격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따위 쓰레기를 판 거 너지! 얼굴 보니 딱 알겠네. 뭣 같이 생겨가지고는!” 매번 유니폼을 벗고 싶어도, 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이 눈에 밟혀 전쟁같이 출근했다. 김씨는 판매원을 그만둔 지금도 당시의 설움을 잊지 못한다.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는 ‘감정노동자’들의 수기가 담긴 공모전 수상 작품집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간했다고 17일 밝혔다. [사진 서울시]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는 ‘감정노동자’들의 수기가 담긴 공모전 수상 작품집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간했다고 17일 밝혔다. [사진 서울시]

 

감정노동, 책으로 엮인 우리 이야기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는 이러한 ‘감정노동자’들의 수기가 담긴 공모전 수상 작품집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간했다고 17일 밝혔다. 감정노동자는 대중과 접촉하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일하는 근로자들을 말한다.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에 대한 영상과 웹툰 등 각종 콘텐트 공모전 수상작이 들어가 있다.
 
작품집을 만들기 위해 지난해 8월부터 2개월간 현장 수기, 웹툰, 동영상 분야  공모전이 열렸다. 총 283편의 후보작이 접수됐으며, 대상 1편ㆍ최우수상 3편ㆍ우수상 3편 등 총 25편이 수상작에 올라 작품집에 담겼다.
 
특히 작품집에는 시민들 인식 개선과 경각심 깨우기 위해 감정노동자들의 실제 수기가 담겼다. 감정노동자들의 고충을 공유해 이들의 권익 보호와 피해 예방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 누구나 감정근로자일 수 있으며,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 중 감정노동 종사자는 약 560만~74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체 근로자의 31~41% 비율로, 이들의 최대 절반가량이 감정노동자라는 결론이다. 감정노동자를 포함하는 직군도 항공기 승무원, 콜센터 직원, 음식점 종업원부터 넓게는 교사와 사회복지사까지 다양하다.
 
지난 2018년 감정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가 문을 열었다. [연합뉴스]

지난 2018년 감정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가 문을 열었다. [연합뉴스]

 감정노동자 보호법 생겼지만…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의 태도에 정신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을(乙)’이기 때문이다. 이완형 가천대 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팀이 2017년 제5차 근로환경조사에 참여한 남녀 근로자 2만3128명을 분석한 결과에도 나타난다. 화난 고객을 늘 대하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수면장애 위험이 3.8배, 남성은 4.4배가 높았다.
 
이 때문에 지난 2018년 감정노동자를 고객의 폭언과 폭행으로부터 보호하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됐다. 고객 응대 근로자가 고객의 폭언으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과 장애에 대한 사업자의 예방조치를 의무화했다.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그러나 현장은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다. 시민단체인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지난해 발표한 ‘2019년 감정노동 및 직장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가 보여준다. 콜센터, 정부기관 등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 2765명을 설문한 결과 여성 응답자의 61.7%, 남성 응답자의 56.8%는 여전히 감정노동으로 인해 심리적 지지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동석 서울시 노동정책담당관은 “시민들과 소비자들의 인식이 다소 개선되긴 했지만, 여전히 감정노동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며 “작품집 발간으로 감정노동의 실태와 사례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감정노동 관련 교육과 홍보를 지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윤상언 기자 youn.san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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