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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비효율에 지친 야구팬 ‘스토브리그’에 공감하다

중앙일보 2020.01.17 00:03 경제 6면 지면보기
드라마 ‘스토브리그’에는 백승수(오른쪽) 단장이 구단주의 조카 권경민과 협력하고 대립하는 스토리가 나온다. [사진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에는 백승수(오른쪽) 단장이 구단주의 조카 권경민과 협력하고 대립하는 스토리가 나온다. [사진 SBS]

지난해 여름, 홍성창 SBS 책임 PD로부터 야구 드라마를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듣고 ‘현실과 동떨어지는 건 아닐까’하는 우려가 생겼다. 홍 PD는 비슷한 말을 여러 군데에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최고 시청률 15.5%(닐슨코리아)를 기록한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많은 우려 속에서 탄생했다.
 

프로야구 부도덕 꼬집은 드라마
가성비 중시하는 팬들에게 어필
선수 아닌 경영자 시각으로 접근
팬들의 야구 사랑 확인하는 계기

이 드라마 시나리오는 2016년 MBC 드라마 공모전 당선작(우수상)이다. 3년 동안 여러 방송국이 시나리오를 거절한 이유는 한결같았다. “스포츠 드라마는 성공하기 어렵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떨어질 것이다”  야구기자도, 드라마 편성 담당자도 고정관념을 떨쳐내지 못했다.
 
여자 운영팀장과 낙하산 직원. [사진 SBS]

여자 운영팀장과 낙하산 직원. [사진 SBS]

‘스토브리그’는 고정관념과 싸우는 이야기다. 젊은 경영인 백승수(남궁민 분) 단장은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꼴찌팀 ‘드림즈’를 뒤흔든다. 간판타자를 트레이드를 통해 내보내고, 스카우트팀 비리를 밝혀낸다. 그러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연봉 협상을 한다. 고비마다 그는 비아냥과 맞닥뜨린다. “당신이 야구를 해봤어?” “네가 야구를 얼마나 알아?”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대사는 구단주의 조카 권경민(오정세 분)이 말했던 “난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이에요”다. 권경민의 정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였지만, 시청자들은 묘한 긴장과 기대를 느꼈다.
 
시청자가 아닌 야구기자로 돌아와 다시 생각했다. ‘스토브리그’의 인기 비결은 뭘까.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가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뭘까. 팬들이 야구에 대해 가진 애증을 드라마가 잘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기고만장하면서 이기적인 스타, 구단에서 월급을 받으며 사익을 추구하는 직원,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별로 낯설지 않다. 야구단 곳곳에 있을 것 같다. 팬들은 백승수 같은 영웅이 등장해 판을 싹 갈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구단주와 단장이 적폐를 청산하고, 경영 효율화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응원하는 야구팀도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팬들은 드라마를 통해 경영자의 시점으로 야구를 보고 있다. 팬들의 눈에 야구단 직원과 선수단, 코칭스태프는 부도덕과 비효율 덩어리다. 이런 시각은 젊은 층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성비의 가치와 잘 맞아 떨어진다. 또한 ‘스토브리그’는 메이저리그 오클랜드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머니볼』과도 맥이 닿아있다.
 
단장과 감독의 조화도 흥미롭다. [사진 SBS]

단장과 감독의 조화도 흥미롭다. [사진 SBS]

최고 인기 스포츠라는 프로야구는 위기에 빠져있다. 4년 연속 800만 명 이상을 기록했던 관중이 지난해 728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TV 중계 시청률과 광고 매출도 감소세에 있다.
 
최근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을 봐도 그렇다. 많은 팬은 초고액 계약을 지지하지 않는다. 선수에게 거액을 안기는 구단을 비난하기도 한다. 온라인 야구게임에서 구단주로 변신해 선수를 사고판 경험이 있는 팬들에게 프로야구는 고비용·저효율 상품이 됐다.
 
수년 전 만 해도 팬들은 선수의 시점으로 야구를 봤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가 성공하고, 돈을 버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 투자에 인색한 구단을 맹비난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팬들의 마음이 변했다. 드라마 등장인물 대부분이 악역으로 보이는 건, 그만큼 팬들이 프로야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스토브리그’는 통쾌하다. 그러나 야구인들을 선과 악, 합리와 무지, 효율과 적폐로 나누는 건 비현실적이다. 선수와 직원도 우리처럼 선하면서 악한, 이기심과 이타심이 뒤섞인 입체적 존재다. 그들을 쉽게 파악할 수 없고, 쉽게 재단할 수도 없다. 백승수라는 한 사람이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다는 건 판타지에 가깝다.
 
‘스토브리그’의 설정이 너무 극단적이지 않느냐고 홍 PD에게 물었다. 그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갈등을 부각했지만 ‘스토브리그’는 어디까지나 사람 이야기다. 결국 사람들이 모여 함께 꿈을 이룰 것이다. 팀 이름이 ‘드림즈’인 이유”라고 말했다. 홍 PD의 얘기를 들으니 앞으로의 전개가 더 궁금해졌다.
 
‘스토브리그’의 인기는 야구에 대한 팬들의 애증을 보여줬다. 드라마와 현실이 꿈꾸는 야구는 그리 다르지 않다. 합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팀이 하나로 뭉치는 것, 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스토브리그’의 성공을 보며 확신했다. 야구인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팬들은 야구를 다시 사랑할 준비가 돼 있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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