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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앞에서는 안아주고 뒤에서는 발목잡는 정부"

중앙일보 2020.01.16 14:19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오섭(75)씨. 조씨는 가습기살균제를 쓴 뒤 가족을 잃고 '폐쇄성 기관지 천식'을 앓고 있다. 정은혜 기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오섭(75)씨. 조씨는 가습기살균제를 쓴 뒤 가족을 잃고 '폐쇄성 기관지 천식'을 앓고 있다. 정은혜 기자

 
“정부가 미친 XX들 같아. 돈을 먹지 않았으면 이럴 수가 없는 거지.” 
정부가 허가한 가습기살균제를 썼다가 2012년 7월 부인(박월복·사망 당시 60)을 잃고 지난해 아들(조덕진·사망 당시 50)도 떠나보낸 조오섭(75)씨는 가래 섞인 기침을 연신 내뱉으며 기자에게 하소연했다. 조씨는 “이렇게 무서운 걸 정부가 허가해서 집안이 초토화되고 너무 비참해서 살 수가 없다”며 “그런데도 개정안이 법사위 통과를 못 한다. 국민의 세금을 받는 정부 기관들이 왜 기업 편을 드니 속이 상해서 살 수가 없다”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올해 1월 기준 사망자 총 1531명(신청자 중 사망자 1518명), 공식 피해인정 신청자 6715명, 문제 제품 사용자 350만~400만명, 건강피해자 49만~56만명. 안방의 ‘세월호 참사’로 불리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상황이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피해자들은 지난 10년 가까이 해결된 건 하나도 없고 정부에 뒤통수만 맞고 있다고 토로한다. 
 
16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개정안 조속통과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성명서를 내고 “정치권이 총선 국면에 들어가기 전인 이번 20대 국회가 마지막 기회”라고 호소했다.
 
황전원 특조위 지원소위원장은 “절박한 심정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운을 뗐다. 특조위는 국가 조사기구로서 그동안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되는 상황을 두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옥시 측 “질병 증명을 극단적으로 완화해 위헌 소지”

지난해 1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한 개정안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피해 입증책임을 완화해 피해자가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사실과 질환 발생 및 질환 악화 사실을 입증하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법무부·기획재정부 등 유관기관이 ‘사업자 이중 배상 부담’ 등 위헌적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법사위는 지난 9일 개정안 의결을 보류했다.   
 
옥시 측도 법사위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옥시는 “증명의 정도를 극단적으로 완화해 사업자의 책임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일반적인 손해배상의 인과관계 추정 법리와 비교해서도 인과관계가 지나치게 쉽게 추정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것이 아닌 질병에 걸리더라도 피해자가 피해를 주장하면 기업이 보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분담금 확대 조항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근거 없이 2배 수준으로 확대해 약 2500억원까지 분담금이 늘어날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사업자가 책임이 없는 경우에도 책임을 지게 될 수 있어 형평에 맞지 않다. 헌법상 평등의 원칙과 자기책임의 원칙에 반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들 “앞에선 돕고 뒤에선 발목을 잡는 정부”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와 대화하는 문재인 대통령.[청와대사진기자단]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와 대화하는 문재인 대통령.[청와대사진기자단]

특조위와 피해자들은 ‘법무부와 기획재정부가 사실상 기업 입장에서 의견을 내 법안 취지를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주무부처인 환경부가 관계부처의 의견에 따라 특별법 개정에 소극적이라고도 주장했다.
 
가습기살균제를 쓰고 폐 한쪽을 잃은 방성훈(61)씨는 “가습기살균제를 쓰고 2011년 폐암 진단을 받아 압축산소통을 가지고 다닌다”며 “그런데 폐암은 인정 질환이 아니라 공식 피해자가 되지도 못했다”며 개정안 통과를 촉구했다. 피해자 대표 최숙자씨도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부르셔서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한명씩 안아줄 때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며 “정부는 결국 앞에서는 도와주고 뒤에서는 발목을 잡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한 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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