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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답변 한달 연기"···이례적 원칙 깬 국민청원은 '강간 규정'

중앙일보 2020.01.16 05:00
 ‘성범죄 양형기준 재정비’를 요청한 국민 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공식 답변. [청와대 페이스북 캡쳐]

‘성범죄 양형기준 재정비’를 요청한 국민 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공식 답변. [청와대 페이스북 캡쳐]

청와대가 14일 오후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성범죄 양형기준 재정비’를 요청한 국민 청원의 답변을 한 달 연기한다고 밝혔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경우 한 달 내에 답변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례적으로 깬 것이다. 청와대가 “신중한 검토”를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만큼 강간죄 요건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해당 국민청원 글은 지난해 11월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 양형기준을 재정비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올라왔다. “과거에 당했던 성폭력을 고소했다”는 글쓴이는 “강간미수에 가까운 성추행을 당했지만, 검찰은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호감이 있었고, 여자가 스킨십을 한 점’을 참작해 ‘기소유예’로 판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가해자의 자백을 바탕으로 고소를 진행했고, 경찰의 기소의견이 있었다. 어떤 합의도, 사과도, 반성도 없이 나온 결과가 기소유예”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성범죄 처벌은 아직도 가해자 중심이다. ‘여자의 NO를 NO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도 좋으면서 튕기는 거 아니냐’는 가해자 중심적 사고방식이 바뀔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게시글은 열흘 만에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고 청원 마감이었던 지난달 15일 기준 총 20만 7723명이 동의했다.  
 

'폭행''협박'이 양형 기준인 강간죄 형법 규정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 개정을 위한 총궐기'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 개정을 위한 총궐기'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글쓴이의 말처럼 현재 강간과 추행의 형법 규정은 이렇다.  

OO 또는 OO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297조/강간)

OO 또는 OO으로 사람에 대하여 유사 강간 행위를 한 사람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297조2/유사강간)  

OO 또는 OO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298조/강제추행)

 
공통으로 들어가는 단어는 ‘폭행 또는 협박’이다. 피해자가 강간죄로 고소하기 위해서는 폭행ㆍ협박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일각에선 성폭행 범죄에 있어 이를 입증하긴 어렵다고 주장한다. 209개의 여성인권단체와 전문가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경험자의 진술은 가장 명확한 증거임에도 폭행·협박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또 폭행·협박이 있었더라도 '피해자가 더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 가능'한 정도의 폭력이라는 이유로 입증 책임마저 피해자의 몫으로 전가된다”고 했다.
 
실제 지난해 6월 10세 초등학생에게 술을 먹인 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30대 학원장의 경우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으로 감형됐다. 학원장이 폭행ㆍ협박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강간죄 구성 요건 '동의' 여부로 개정해야"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참가자들이 18일 오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참가자들이 18일 오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연대회의는 지난해 8월부터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 형법이 피해자의 현실과 경험을 반영하여 강간을 판단함에 있어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재련 변호사 역시 “강간죄 등 성폭력 범죄의 보호 법익 자체가 개인의 자기결정권이다. 보호 법익에서 봤을 때 허락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적 접촉행위를 하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기 때문에 물리적 폭력 여부 등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 “실제 판례는 형법 규정보다 앞서가고 있다. 현행 형법상 강간죄 규정은 개정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여성청소년 사건을 담당하는 한 일선 경찰은 “우리나라는 강간죄 판결이 최협의설(좁게 해석하는 것)에 의해 이뤄진다.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동의 없이 성관계하면 강간)는커녕 노 민스 노(No Means No, 부동의에도 성관계하면 강간)룰까지도 못 갔다”면서 “강간 개념을 세분화하는 등 전향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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