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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슬쩍 통과시킨 '사외이사 연임 제한'···"친여 자리 만드나"

중앙일보 2020.01.15 16:06
지난해 SK 주주총회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지난해 SK 주주총회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상장회사들의 주주총회가 매년 3월에 몰리는 이른바 ‘벚꽃 주총'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상법 시행령 개정이 당·정·청 협의를 거치면서 ‘사외이사의 연임 제한 규정'이 슬쩍 도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재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 1년 유예를 검토하던 정부가 제도 도입을 강행하면서 566개 상장사는 앞으로 한 달 안에 새로운 사외이사를 구해야 하는 대란이 불가피해졌다.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재계와 법조계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친여 인사들을 위한 자리 마련용 아니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  

 

올해부터 사외이사 임기 6년 제한...상장사들 '어리둥절' 

15일 업계와 법무부 등에 따르면 상장사 사외이사의 임기를 6년으로 제한하는 상법 시행령 개정안이 지난 10일 법제처 심사를 통과했고, 14일 차관회의 심의를 마쳤다.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 재가 절차를 거치면 2월 초부터 공포돼 시행된다. 
 
바뀐 상법 시행령이 시행되면 한 상장사에서 6년 넘게 사외이사로 재직했거나, 계열사를 포함해 9년 넘게 사외이사로 재직한 자는 더는 같은 회사의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게 된다. 상장사들은 올해 3월 이후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6년 이상 재직했던 사외이사를 당장 교체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이 시행령 적용으로 올해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교체해야 하는 상장사(금융업종 제외)는 566곳(코스피 233곳, 코스닥 333곳)으로, 대상자는 718명(코스피 311명, 코스닥 407명)에 이른다. 
 
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현 사외이사가 당장 그만둬야 하냐, 업계를 잘 아는 사외이사를 갑자기 어떻게 구하냐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며 "정권 코드에 맞는 인사를 사외이사로 데려오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고 상황을 전했다. 
 

지난해 4월엔 언급 없다가 9월 당·정·청 협의서 '슬쩍' 도입 

박정훈 금융위원회 자본시장정책관이 지난해 4월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상장회사 등의 주주총회 내실화 방안' 관련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박정훈 금융위원회 자본시장정책관이 지난해 4월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상장회사 등의 주주총회 내실화 방안' 관련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재계는 정부가 기업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와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4월 '상장회사 등의 주주총회 내실화 방안'을 마련해 발표했는데, 당시에는 사외이사 임기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당시 핵심 내용은 상장사 주주총회가 3월에 몰려 있어 개인 투자자들이 의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주총 개최일을 5~6월('장미주총')까지로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9월 정부와 여당, 청와대는 예고 없이 당·정·청 합동으로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을 발표하면서 사외이사 연임 제한 규정을 슬쩍 끼워 넣었다. 당시 당·정·청은 "국회에 제출된 공정거래법 전부 개정안이 처리되고 있지 않다"며 "국회 통과가 필요한 법률 개정 대신 정부가 자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시행령·규칙·예규 등을 개정해 공정 경제 과제를 제도화하겠다"는 취지로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부터)와 조정식 정책위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해 9월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왼쪽부터)와 조정식 정책위의장,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해 9월5일 오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정경제 하위법령 개정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 발표에는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 김오수 법무부 차관 등이 참석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어느 날 갑자기 공정경제 성과 창출을 위한 시행령 개정 사안을 발표하더니, 형식적으로 의견을 듣고 재계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밀어붙였다"며 "직업 선택의 자유 등 기본권을 제한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법률 개정이 필요해 보이는데, 국회 통과가 어렵다고 봤는지 시행령 개정으로 우회했다"고 꼬집었다. 
 

"친여 자리 만들기 아니냐...문제 생기면 헌법소원도 가능" 

상장회사협의회는 당·정·청 발표 이후 정부에 시행령 개정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헌법상 보장된 사외이사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과 해외에 비슷한 입법 사례가 전무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 현실적으로 업종별·회사별로 요구되는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찾기 힘들다는 점도 호소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시행령 개정 과정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계와 법조계에서는 청와대와 여당이 친여 인사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을 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 상장사 사외이사의 경우 60%가량이 관료·교수 출신이고 그 풀(pool)도 한정돼 있다"며 "기업들 입장에서는 급작스럽게 전문성 있는 사외이사를 데려오지 못할 바에야 친여 코드의 사외이사를 영입하려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지청장 출신 한 변호사는 "아직 시행령 개정이 완료되지 않았고, 그에 따르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 이른 감은 있지만 사외이사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기업의 사적 자치를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헌법소원도 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분석했다. 
 

법무부 "주총까지 시간 충분히 남았다"

다만 법무부 관계자는 "매년 있는 일상적인 과정인데, 기업들이 그것을 힘들다고 하는 건 약간 과장된 것 같다"며 "주총까지 (새로운 사외이사를 선임할) 충분히 시간이 남아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강광우 기자 kang.kwang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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