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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숙적 이란·美 손잡게 했다, 입 딱 벌어지는 '카부스'의 중재비결

중앙일보 2020.01.14 06:00
지난 10일 79세로 서거한 중동 군주국가 오만의 술탄(이슬람 군주)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는 중동 지역에서 ‘외교 거인’으로 통한다. 1970년 즉위한 카부스 술탄은 ‘모두에게 친구이고, 어느 누구에게도 적이 아닌’이라는, 균형적이고 실용적인 원칙 아래 대외정책을 실용적으로 이끌었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친사우디아라비아와 친이란, 친미와 반미로 나뉘면서 편가르기와 이를 통한 대립과 갈등, 분쟁이 일상적인 중동에서 드문 균형 외교다. 카부스의 외교적 명성도 이런 실용적인 외교 정책과 그 성과에서 나왔다. 
오만의 술탄(이슬람 군주)인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왼쪽)의 중재로 중동의 숙적이 손을 잡았다. 2007년 12월 3일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렸던 걸프협력회의 개막식에 앞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당시 국왕(가운데)이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당시 대통령과 손을 잡고 이동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수니파의 중심국가이며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서 두 나라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카부스의 중재로 일시적이지만 화해 분위기를 연출했다. 압둘라 국왕ㅇ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그해 3월 카부스의 중재로 리야드에서 이슬람혁명 뒤 첫 양국 정상회의를 열었다. [AP=연합뉴스]

오만의 술탄(이슬람 군주)인 카부스 빈 사이드 알사이드(왼쪽)의 중재로 중동의 숙적이 손을 잡았다. 2007년 12월 3일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렸던 걸프협력회의 개막식에 앞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당시 국왕(가운데)이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당시 대통령과 손을 잡고 이동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수니파의 중심국가이며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서 두 나라는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카부스의 중재로 일시적이지만 화해 분위기를 연출했다. 압둘라 국왕ㅇ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그해 3월 카부스의 중재로 리야드에서 이슬람혁명 뒤 첫 양국 정상회의를 열었다. [AP=연합뉴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오만 군주 카부스가 보여준 중재자의 자격
종교·종파 자유로운 통 큰 외교 거인 서거
시아, 수니 아닌 ‘관용’ 추구 이바디파 신봉
‘누구와도 친하고 적은 만들지 않는다’ 원칙
사우디-이란, 미국-이란 중재 외교술 보여
2018년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도 초청해
은둔의 나라 개방해 활기찬 현대국가 변신
노예폐지·내란종식·헌법반포에 생활향상
‘전통 파괴 않고 현대화’남녀평등 헌법제정

2015년 이란 핵합의와 사우디-예멘반군 중재

카부스가 생전에 이룬 외교 업적을 살펴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BBC·CNN·가디언 등 외신을 종합한 결과다. 우선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하던 2015년 이란 핵합의를 중재했다. 
이란은 2015년 7월 P5+1, 즉 유엔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및 독일과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즉 핵합의를 이뤘다. 이란은 핵 활동을 중단하고 국제사회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푼다는 내용이다. 핵합의는 아쉽게도 2018년 5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 탈퇴하고 대이란 경제제재를 재개하면서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동의 갈등을 대화와 협상, 대타협으로 풀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역사적 외교성과로 평가 받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서남쪽에 국경을 맞댄 예멘의 시아파 후티 반군과 협상하도록 오만에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 것도 카부스 술탄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에미리트(UAE)·이집트 등과 수니파 연합군을 결성해 후티 반군과 혈전을 벌인 사이였는데 카부스의 중재로 오만에서 평화를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지난 10일 서거한 오만의 카부스 술탄. 편들지 않는 신뢰의 중재 외교로 은둔의 국가를 중동 외교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일 서거한 오만의 카부스 술탄. 편들지 않는 신뢰의 중재 외교로 은둔의 국가를 중동 외교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카타르 사태 중립 일관해 균형추 노릇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이집트가 우선 카타르와 단교하고 다른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이 추가로 단교에 동참하는 ‘카타르 위기’에서도 카부스는 냉정하게 중립을 지켰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 따르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카타르가 테러리즘을 후원하고 언론(1996년 개국한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중동 각국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카타르에 압력을 가했다. 사실은 카타르의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국왕이 이란에 비교적 호의적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인구 230만 명(그 중 90%는 외국인)에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3위, 수출량은 전 세계 물량의 30%를 차지해 세계 1위인 카타르는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독자 노선을 추구해왔다. 외래문화에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자세로 서구식 개혁에도 앞장섰다. 타밈 국왕은 2020년 1월 미국과 갈등을 빚은 이란을 가장 먼저 방문한 외국 정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부스는 카타르 사태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립의 균형추 역할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 카타르 국교 단절을 요청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균형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카부스는 앞으로 카타르 사태를 중재나 협상으로 푸는 주역이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아쉽게 사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오만의 카부스 술탄(오른쪽)이 1983년 4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부를 만나고 있다. 카부스는 미국과 밀접한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시아파의 이란, 수니파의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서 대립하는 다양한 세력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두가 친구이고, 적은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AP=연합뉴스]

오만의 카부스 술탄(오른쪽)이 1983년 4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부를 만나고 있다. 카부스는 미국과 밀접한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시아파의 이란, 수니파의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서 대립하는 다양한 세력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두가 친구이고, 적은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AP=연합뉴스]

수니·시아 아닌 관용·이해·공존 추구 이바디파  

면적 30만9500㎢으로 한반도의 약 1, 4배에, 인구는 2018년 추정치로 480만 명 정도인 이 작은 나라의 군주가 어떻게 이런 평가를 얻었을까. 카부스가 이런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세계의 종파 싸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자신의 입지를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오만인은 이슬람 세계에서 독특하게 시아파도 수니파도 아닌 이바디파라는 소수 종파를 따른다. 이바디파는 이슬람 세계가 수니파와 시아파가 나뉘기 이전에 갈라져 나온 오랜 종파로, 이슬람 공동체의 화합을 중시하면서 관용·이해·공존을 추구하는 종파로 알려졌다. 수니와 시아에 눌려 세력이 약하고 이에 따라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종파다. 오만은 이슬람 종파상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을 잡기도, 이란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어색한 입장이다.  
하지만 카부스는 오만의 약점일 수 있는 이 종파 문제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해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었다. 이를 중립적이고 균형적인 외교적 위상을 확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손자병법대로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든 셈이다.
 
카부스는 서로 적대시 하는 세력들과 모두 잘 지내는 외교 역량을 보였다. 그는 1979년 이슬람혁명 전에는 이란의 샤와도 가깝게 지냈으나, 혁명 뒤에는 이란의 이슬람 세력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슬람 수니파이고 아랍어를 쓰는 걸프 지역국가들과 이슬림 시아파이며 이란어를 쓰는 이란 사이에서 이슬람 이바디파의 오만은 균형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오만은 호르무즈을 사이에 두고 이란과 마주보고 있다.

오만은 호르무즈을 사이에 두고 이란과 마주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남쪽 차지…이란·미국 모두 친밀

오만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세계 에너지 수송로의 병목인 호르무즈 해협은 북쪽에 이란이 있고 남쪽에는 오만의 역외영토(본토와 이어지지 않은 영토)인 무산담이 있다. 무산담과 오만 본토 사이에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동부지역이 있다. 카부스는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가치를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이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주로 이란과는 경제, 서구와는 군사 관계를 강화했다. 이란은 물론 그 숙적인 미국과도 가까운 드문 나라가 됐다.  
오만의 카부스 술탄(왼쪽)이 2009년 8월 4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카부스는 이란과 친하면서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친분을 유지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오만의 카부스 술탄(왼쪽)이 2009년 8월 4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카부스는 이란과 친하면서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친분을 유지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우디-이란 중재 노력

이를 바탕으로 카부스는 서로 갈등을 빚어온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이란 사이에서 중재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수니도, 시아도, 서구세력도 아닌 카부스는 중재의 적격자로 통했다. 종파 다툼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한쪽 편을 들거나 들려 한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 객관적인 자세로 외교적 중재 노력을 벌일 수 있었던 덕분이다. 결국 카부스는 일시적이라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과 이란의 마무드 아메드네자드 대통령이 손을 잡게 했다. 두 사람은 2007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만나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뒤 처음으로 양국 정상회담을 했다. 그 자리에는 카부스 술탄이 함께했다. 당당한 중재자의 모습이었다.  
 
오만의 카부스 술탄(오른쪽)이 2013년 5월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고 있다. 카부스는 1992년 걸프전 당시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파병했으며, 2003년 이라크전 때는 자국의 기지를 미군에 제공하는 등 미국에 군사적으로 협조해왔다. 그러면서도 이란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중재외교를 벌일 수 있었던 바탕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오만의 카부스 술탄(오른쪽)이 2013년 5월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고 있다. 카부스는 1992년 걸프전 당시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파병했으며, 2003년 이라크전 때는 자국의 기지를 미군에 제공하는 등 미국에 군사적으로 협조해왔다. 그러면서도 이란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중재외교를 벌일 수 있었던 바탕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자주 추구해도 적을 만들지 않는 외교술

그는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이를 도와준 영국 군사고문들을 우대했으나 1970년대 후반이 되자 이들을 서서히 배제하고 군대의 지휘를 모두 오만인 장교에게 넘기도록 했다. 그럼에도 영국과는 계속 밀착했으며 군사나 외교 관계를 계속 돈독하게 유지했다. 자주를 추구하면서도 결코 적은 만들지 않는 카부스의 외교술이다.  
그는 호르무즈 해협의 남쪽을 차지한 오만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최대한 활용해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펴나갔다. 부친의 고립정책에서 탈피해 1971년 유엔에 가입했으며 1981년엔 아랍연맹에 들어갔으며 페르시아만 연안국가로 이뤄진 걸프협력기구의 창립회원국이 됐다.  
2013년 이란 수도 테헤란을 방문해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오른쪽)과 함께한 오만의 카부스 술탄의 모습' [EPA=연합뉴스]

2013년 이란 수도 테헤란을 방문해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오른쪽)과 함께한 오만의 카부스 술탄의 모습' [EPA=연합뉴스]

 

걸프전·이라크전에서 미국과 협력  

카부스는 미국, 영국 등 서구국가와 밀접한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는 자신이 유학했던 영국보다 패권국가인 미국과 관계를 강화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카부스는 미국 주도의 연합군에 오만 병력을 보냈으며, 2003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몰아내는 이라크전 당시에는 오만의 기지를 미국과 연합군에 제공했다.  
 

이슬람권 숙적인 네타냐후와 오만에서 대화

카부스는 외교관계 체결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스라엘과도 비교적 잘 지낸 중동 이슬람권 지도자다. 이스라엘은 외교관계를 수립한 터키·이집트·요르단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슬람 세계가 멀리하는 나라다. 이스라엘을 방문한 기록이 있는 외국인은 입국을 거절하는 나라가 대부분이라 이스라엘은 아예 입국 사증이나 기록을 여권에 찍지 않고 작은 카드로 만들어서 줄 정도다.  
그럼에도 카부스는 2018년 10월 이스라엘의 매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방문을 받아들였고 무스카트에서 만나 회담했다. 이는 카부스가 투병 중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정상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와 잘 지낸다는 자신의 원칙을 지킨 셈이다. 카부스는 음악 애호가로 2011년 수도 무스카트에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오만의 카부스 술탄의 지난해 1월 모습. [AP=연합뉴스]

오만의 카부스 술탄의 지난해 1월 모습. [AP=연합뉴스]

 

내정은 ‘전통 파괴 않고 현대화’ 정책  

카부스는 내정에서는 폐쇄적인 ‘은둔의 나라’였던 오만을 개방해 활기찬 현대국가로 변신시킨 혁신의 군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전통을 파괴하지 않고 현대화를 이룬다’는 구호 아래 전통적인 이슬람 공동체 사회는 그대로 살리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제도와 규범은 현대적으로 개혁했다.  
카부스의 개혁 조치 중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시대착오적인 노예제 폐지다. 그는 1970년 즉위하자마자 이를 불법화했다. 카부스는 고질적인 노예제의 전통을 폐지하고 현대 국가를 향해 오만의 뱃머리를 돌린 개혁 군주다.    
 
오만 수도 무스카트의 건물 벽에 걸린 카부스 술탄의 초상화, [로이터=연합뉴스]

오만 수도 무스카트의 건물 벽에 걸린 카부스 술탄의 초상화, [로이터=연합뉴스]

안보 불안 제거하고 경제·사회 발전

카부르는 1962년부터 나라를 뒤흔들던 남부 도파르 지역의 공산주의자 반란을 영국·요르단·이란(당시엔 샤의 군주국)의 지원을 받아 5년 만에 진압했다. 안보 불안 요인을 우선적으로 제거하면서 카부스의 개혁은 본격화했다. 나라 이름도 ‘오만·무스카드국’에서 ‘오만 술탄국’으로 바꿨다. 사실 카부스가 술탄에 즉위할 무렵 오만 국민의 상당수는 가난과 문맹, 그리고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대수명은 40세 정도일 정도였다. 영양과 보건 수준이 모두 떨어진다는 의미다. 경제는 어업과 농업에 의존했다. 인프라도 형편 없었다. 포장도로는 10㎞도 되지 않았다.  
카부스는 1960년대 중반에 발견됐던 유전을 가동해 얻은 자금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민 생활을 향상했다. 에너지와 함께 관광, 물류 등 다양한 산업을 일으켰다. 카부스는 과감했다. 즉위하자마자 첫 조치로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인 데 이어 병원·학교 설립과 도로 건설 등 인프라 확충에 매달렸다. 그 결과 현재 평균 수명은 70대 중반이고 문자해득률은 90%에 이른다. 그가 즉위한 직후인 1970년대만 해도 오만에서 보기 드물었던 병원과 학교는 이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시설이 됐다. 대부분 ‘술탄 카부스’라는 이름이 붙어있어 그가 재위하는 동안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시원한 고속도로의 명칭부터가 ‘술탄 카부스 도로’이다. 
 
지난 10일 서거한 카부스 오만 술탄은 숨진 지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이슬람 풍습대로 11일 장례를 치르고 왕실 묘지에 안장됐다. 군용 차량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장식도, 낭비도 없는 수수한 장례식이다. [신화=연합뉴스]

지난 10일 서거한 카부스 오만 술탄은 숨진 지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이슬람 풍습대로 11일 장례를 치르고 왕실 묘지에 안장됐다. 군용 차량이 운구를 준비하고 있다. 장식도, 낭비도 없는 수수한 장례식이다. [신화=연합뉴스]

헌법 제정하고 여성 권리 신장

카부스식 개혁의 꽃은 1996년 헌법인 오만 기본법 제정과 반포한 일이다. 오만 기본법은 젠더·출신·피부색·언어·종교·종파·거주지·사회계층에 따른 차별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남녀 모두에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고 공직 임용에서 차별하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면서도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을 해치지 않는다면 다른 신앙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종교적·사회적으로 보수 일색인 아라비아 반도의 군주제 국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만에선 카부스가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여성이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게 뉴스가 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축구경기장에 여성의 입장이 허용된 게 화제인 이란과는 사뭇 결이 다른 게 카부스의 오만이었다.    
 
오만의 카부스 술탄(오른쪽)이 지난 2010년 11월 나라 이름을 오만술탄국으로 바꾼 지 40년이 된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을 만나고 있다. 요르단은 이집트, 터키와 더불어 이슬람 세계에서는 드문 이스라엘과의 수교국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오만의 카부스 술탄(오른쪽)이 지난 2010년 11월 나라 이름을 오만술탄국으로 바꾼 지 40년이 된 날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을 만나고 있다. 요르단은 이집트, 터키와 더불어 이슬람 세계에서는 드문 이스라엘과의 수교국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쿠데타로 술탄에 올라

이런 업적을 쌓은 카부르는 말년에 대장암과 투병하다 지난 10일 수도 무스카트에서 숨을 거뒀으며 11일 자신의 이름을 딴 술탄 카부스 대모스크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왕실 묘지에 안장됐다. 숨진 다음날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이슬람교의 전통이다. 문화부 장관을 맡았던 조카 하이탐 빈 타리크 알사이드가 카부스를 승계해 술탄에 올랐다. 카부스는 사촌과 3년간 결혼생활을 하다 이혼한 뒤 독신으로 살았으며 직계 자손이 없었다.  
카부스는 1940년 오만의 항구도시 살랄라에서 ‘오만무스카트국’의 의 술탄이던 부왕 사이드 빈 타이무르 알사이드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에 유학해 서식스에서 사립학교를 다닌 뒤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마치고 1년간 장교로 복무하다 귀국했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의심 많은 부왕은 그에게 아무런 자리를 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가택연금까지 시켰다. 카부스는 1970년 영국의 도움을 받아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부친을 폐위하고 술탄 자리에 올라 50년 가까이 통치했다. 생전에 아랍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였던 카부스는 절대군주였지만 자비심과 개혁 성과, 그리고 외교적 업적으로 인해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카부스의 뒤를 이어 오만의 새 술탄에 오른 하이탐 빈 타리크 알사이드(가운데). [신화=연합뉴스]

카부스의 뒤를 이어 오만의 새 술탄에 오른 하이탐 빈 타리크 알사이드(가운데). [신화=연합뉴스]

 

절대왕정 추구, 정당·집회 허용 않은 건 한계  

카부스는 1749년부터 오만 지역을 통치한 사이드 왕조의 제14대 군주다. 그의 이름에 붙은 알사이드는 그가 사이드 왕조 출신임을 나타낸다. 사이드는 현재 아랍권에서 가장 오래뙨 왕조다. 오만도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주권국가의 하나다. 카부스는 오만과 사이드 왕조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군주로 기록될 것이다.  
문제는 카부스의 통치가 자신의 능력과 영감, 그리고 자비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는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며 왕실 인사들에게조차도 권력을 나누지 않았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에도 부패 의혹이 드러난 몇몇 장관을 경질하고 의회 성격의 자문회의의 권한을 확대했을 뿐 정당 설립이나 집회의 자유는 여전히 허용하지 않았다. 카부스가 세상을 떠난 오만은 여전히 절대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오만이 진정한 현대국가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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