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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구례 운조루가 주는 감동

중앙일보 2020.01.14 00:23 종합 32면 지면보기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전라북도 남원에서 경상남도 하동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 전라남도 구례 땅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운조루(雲鳥樓)란 표지가 나옵니다. 이 표지를 따라 들어가면 토지면 오미리에 큰 기와집이 나타납니다.
 

적선과 구휼이 진정한 명당
한국을 지켜온 어머니들의 힘
기부할수록 더 잘되는 사업

조선 영조 52년(1776년),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99간의 대규모 저택입니다. 대구 출신의 무장 유이주는 낙안군수로 재직할 때 이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운조루란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집의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것입니다. “雲無心以出軸(무심한 구름은 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날기에 지친 새는 돌아올 줄을 안다)”에서 두 글자를 따왔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돼 있고 2016년에는 유물전시관이 준공 개관하였습니다.
 
운조루가 특히 빛나는 것은 나눔의 정신입니다. 운조루에는 행랑채에 쌀이 세 가마 들어가는 원통형 나무 뒤주가 있는데 아랫부분에 쌀을 꺼내는 마개가 있고 그 위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씌어 있습니다. ‘누구나 열 수 있다’란 뜻이죠. 운조루 주인은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지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베푼 쌀은 수확량의 20%가 됐다고 합니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오던 시절, 구례 일대의 주민들은 운조루 덕으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지리산 기슭인 이곳은 여순반란사건과 6·25 동란 그리고 지리산 공비 토벌의 무대였습니다. 그 난리 속에서도 운조루가 멀쩡했던 것은 오랜 적선과 구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정신 덕분이었습니다. 운조루는 그런 점에서 진정한 명당입니다.
 
지난해 말, 저는 서울에서 열린 걸스카우트 아태 지역 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걸스카우트은 세계적인 자원봉사단체지요. 국제대회를 준비하는 걸스카우트 대원들의 열정과 봉사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 기획에서 준비, 대회에 이르기까지 불철주야로 일하는 여성들에게서 대한민국을 지켜온 어머니들의 강인한 힘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행사가 끝난 뒤 과로로 앓아눕지나 않을지 염려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자발적인 헌신으로 이끌었을까요?
 
역시 세계적인 자원봉사단체인 국제 로타리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세계를 소아마비의 공포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전 세계 120만 명의 로타리안들이 수십 년 동안 기금을 모으고, 열악한 지역의 아동 25억 명에게 예방백신을 투여하는 활동으로 이제 소아마비는 최후 박멸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서 로타리라는 단체에 모인 사람들의 힘으로 인류의 난제 가운데 하나를 해결하는 것을 보며 세계 평화의 큰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부자들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거액을 기부해 동참하고 있습니다.
 
근현대사에서 최대의 기부자는 다이너마이트로 큰돈을 번 알프레드 노벨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재단을 만들어 인류 복지와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매년 상을 주도록 했지요. 노벨상은 인류의 정신적 향상에도 기여하는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기부자는 이종환 삼영화학 회장입니다. 이 회장은 2000년 6월, 10억 원의 사재를 들여 재단을 만들었고 2년 후에 ‘관정이종환교육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계속 기부를 늘려 현재는 1조 원으로 장학 사업을 펴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전 재산의 97%에 해당합니다.
 
자서전 원고를 감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관정 선생을 뵌 적이 있습니다. 회장실에는 수수한 차림의 노인이 앉아 있었고, 얘기를 나누다 점심시간이 되자 저를 데리고 근처 중국식당으로 갔습니다. 자리에 앉자 우동을 주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관정 선생의 기부 철학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수익이 나면 재단에 보내는데, 그럴수록 사업이 더 잘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무엇이 가장 보람 있느냐는 물음에는 ‘할아버지 덕분으로 공부를 잘하고 있다’는 장학생의 편지를 받을 때라고 했습니다. 이 회장은 관정 장학생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이 소망이라고도 했습니다. 새해 97세. 그의 꿈은 푸릅니다.
 
세상은 문제가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감동으로 채워야 합니다. 감동적인 삶. 그것은 나보다 남을 위한 봉사, 기부하는 삶입니다.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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