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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기쁨이 '죽음의 길'···산업재해자 절반이 1년 미만 신입

중앙일보 2020.01.14 00:03 종합 8면 지면보기

제2의 김용균 막자 〈하〉 

박주희(30·가명)씨는 지난해 5월 의식불명(코마) 상태에 빠졌다. 동료에 따르면 박씨는 승강기에서 내리며 “저 숨이 안 쉬어져요”라고 말하더니 곧장 의식을 잃었다. 일주일 동안 무의식의 시간을 보냈다. 이 회사에서 근무한 건 불과 한 달. 박씨는 “원인은 예전 직장에서 누적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초년생들 다치고 죽는데
정부 감시 능력은 형편없어
근로감독관 1인당 담당 근로자
한국 4만4258명, 독일 8507명

박씨는 2015년 1월 대기업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취업했다. 축하도 잠시, 악몽의 시작이었다. “출근해서 오후 8시가 돼서야 화장실에 갈 정도로 억압된 분위기였다”고 한다. 막내로서 아양도 떨고 부당한 요청에도 응하며 버텼다. 그즈음 책임프로듀서(CP)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는 일이 잦아졌다. 가슴이 느닷없이 덜컹 내려앉으며 심정지 징후를 보이기도 했다. 수차례 병원 예약도 했지만 쏟아지는 일에 진료 한 번 받지 못했다. 결국 박씨는 퇴사했다.
  
스트레스, 상사·고객 갑질 따른 질환 확산
 
1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안정을 취한 박씨는 서울시 산하 공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극심한 비효율 행정, 직업의식 부재, 무책임성 등을 경험하며 나의 미래를 맡길 곳은 아니다”는 생각에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이후 현 직장에 들어와 한 달 만에 쓰러졌다. 박씨는 “회사에선 산재 요양을 충분히 하고 복귀하라며 배려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산업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산재의 유형도 다변화하고 있다. 스트레스, 상사나 직원 또는 고객의 갑질에 따른 질환이 확산하고 있다.
 
급증하는 심혈관 질환 산재. 그래픽=신재민 기자

급증하는 심혈관 질환 산재. 그래픽=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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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 스트레스에 의한 뇌심혈관계 산재 질환은 8105명(2018년 기준)으로 전년(6129명)에 비해 32.2%나 증가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산재 인정을 받은 경우도 2018년 126명으로 전년(24건)보다 5.3배 늘었다. 우울증(52건), 적응장애(32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21건), 급성 스트레스 장애(8건), 불안장애(1건) 등 유형도 다양하다.
 
신입사원은 특히 취약하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10월 뇌경색 진단을 받은 A씨의 산재를 인정했다. 그는 2017년 10월 입사 5개월 만에 회사 숙소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A씨의 근무상황은 심각했다. 납품일에 맞추려고 야근과 휴일 근무를 반복한 데다 회사의 잡무도 도맡았다. 설계도 수정과 작성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와중에 선배가 주관하는 회식은 일주일에 두세 차례나 됐고, 다음 날 제대로 못 쉬고 출근했다. 소위 ‘신입 뺑뺑이’였던 셈이다.
 
2018년 재해자 가운데 근속기간 1년 미만인 근로자는 3만8557명으로 전체 재해자의 52%에 달했다.
 
앳된 사회 초년생들이 이렇게 많이 다치고 죽는데 정부의 감시 능력은 형편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7년 ‘규제개혁 보고서-한국 규제정책’을 통해 “다른 회원국에 비해 산업안전·보건 관련 규제 집행 인력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산업안전을 지도하고 감독할 사람이 없어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야 수습에 나서는 구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다. 미연에 방지할 여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OECD에 보고된 ‘규제 집행 인력(근로감독관) 1인당 담당 근로자 수’는 한국이 4만4258명(2015년 기준)이다. 영국(1만2221명), 독일(8507명)과 비교하면 근로감독관이 격무에 시달려 산재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될 지경이다.
 
공공부문은 산재의 또 다른 사각지대다. 지난해 5월 12일 이은장(32·충남 공주우체국 집배원)씨는 오후 9시가 넘어 퇴근해 쓰러지듯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로 밝혀졌다. 유족은 “집에서도 우편물을 정리할 정도로 일이 많아 힘들다고 했다”고 전했다. 30대 젊은 나이에도 감당하기 힘든 피로가 켜켜이 쌓였던 셈이다.
  
집배원 4년간 191명 숨져…위기의 공공부문
 
산재 절반이 근속 1년 미만 근로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산재 절반이 근속 1년 미만 근로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이씨가 숨지기 하루 전 의정부우체국의 박호성(58)씨, 한 달 뒤인 6월 19일엔 충남 당진의 강길식(49) 집배원이 같은 증상으로 돌연사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191명의 집배원 등 우정직 공무원이 일터와 가족을 두고 떠났다. 한 해 평균 38명, 10일에 한 명꼴이다. 사망 사유는 대개 교통사고, 심혈관 질환, 심장마비 등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 결과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일하는 집배원이 87.7%였다. 2018년 8월 교통사고로 숨진 경남 거창우체국 김병국(54) 집배원은 하루 100㎞가 넘는 길을 우편물을 싣고 오갔다. 그는 거창군 내 3개 면(위천면·고제면·북상면)을 책임졌다.
 
휴가도 제대로 못 쓴다. 병가를 안 쓴 사람이 71.2%에 달할 정도로, 다쳐도 일터를 지킨다. 동료에게 업무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다. 정(情)을 나르다 정 떨어지는 근로환경에 결국 정을 떼고 세상을 등진 셈이다.
 
지난해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등에서 사고로 숨진 근로자는 79명이다. 한 달에 7명가량이 정부 관할 기관에서 죽는 셈이다. 여기에 집배원을 포함한 공무원은 빠져 있다. 공공기관이 산업안전 감독 대상으로 포함된 것도 지난해 3월 들어서다. 이마저도 자율점검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는 “공무원을 비롯한 공공부문에서 산재 사망자가 지속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산업환경 후진국임을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공공부문이 더 강력한 제어로 산업안전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정용환·전익진·최현주·신진호·이병준 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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