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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 209명에 대리 132명···요즘 식당 예약하는 막내가 44세

중앙일보 2020.01.13 05:00 종합 2면 지면보기
 
 66만6163개. 국내에 있는 기업체 수(2017년 기준)입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인 셈입니다.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중앙일보가 새 디지털 시리즈인 [기업 딥톡(Deep Talk)]을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기업의 변화,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는 직장인의 꿈·희망·생활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기업 딥톡]① 늙어가는 한국기업

 
#16년차 대기업 직장인 김기호(가명ㆍ44) 씨는 부서 막내다. 그가 속한 팀의 팀원은 13명. 팀장은 51세다. 팀장 말고 51세 팀원이 3명 더 있다. 회식 장소 예약이나 각종 행사 준비 등은 막내인 그의 몫이다. 선배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회의나 교육도 그가 간다. 그의 팀이 속해 있는 본부 전체로 넓게 봐도 그는 100여 명의 직원 중 서열 96위다. 신입 사원을 적게 뽑다 보니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김 씨는 10일 “인사팀에 물어보니 우리 회사 직원 평균 나이가 46세라고 하더라”며 “막내라서 술값 등을 내지 않는 건 좋지만, 16년째 막내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또다른 대기업 계열사인 A사엔 부장급 직원만 209명이 있다. 임원 이하 전 직원(897명)의 23%가 부장이다. 반면 조직의 손발이 돼야 할 대리급 직원은 132명(14.7%)에 그친다. 가장 낮은 직급인 5급 사원은 46명에 불과하다.
 
A기업의 직급별 인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A기업의 직급별 인원.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기업 내에서 ‘나이 많은 막내’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매출 부진과 비탄력적인 고용시장 상황 등으로 신입사원은 적게 뽑지만, 기존 구성원들은 계속 조직에 머물고 있어서다. 그러다 보니 간부 사원이 평직원보다 많은 ‘역삼각형 조직’이 흔해지는 상황이다. 한 예로 2000년대 후반 한 해 100명가량의 신입 사원을 채용했던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40여 명의 신입 사원을 뽑는 데 그쳤다.  
 

그룹 본사·지주사 등은 '태반이 간부' 

연령별 임금 근로자 수.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연령별 임금 근로자 수.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대기업집단 그룹 본사나 지주회사 등은 조직 분위기상 역삼각형 구조가 더 심한 편이다. K그룹 지주사의 경우 전 직원 중 차장ㆍ부장급인 '수석'이 36.6%로 대리ㆍ과장급인 책임(35.9%)보다 더 많다. 
임금 근로자의 나이가 많아지고 있단 점은 통계수치로도 확인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임금 근로자 일자리(2017년 12월 기준) 중 20ㆍ30대의 일자리는 784만6000개지만, 40ㆍ50대의 일자리는 917만1000개에 달한다. 그래서 기업들이 겪는 ‘나이 많은 막내’ 현상은 인구 구성 변화에 따른 부득이한 현상이란 평도 있다. 
 

부장인데 허드렛일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 중인 직장인들. [연합뉴스]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 중인 직장인들. [연합뉴스]

 
이런 연령대 구성은 일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전엔 부장이면 뭔가 의사 결정을 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했었는데, 이젠 아예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어요. 20년 전 기준대로면 나도 팀장 2~3년 차 정도는 돼야 했는데 여전히 말단 업무만 하고 있는 거죠.” CJ그룹의 한 부장급 직원이 털어놓은 말이다. 
 
한화그룹의 한 임원도 “요즘 부장들의 재량 권한은 과거 과장들이 갖고 있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팀장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2~3명 단위로 팀을 잘게 쪼개는 일도 일상이 됐다.

 

젊은 직원들 눈치까지 봐야  

달라진 사회 분위기는 '늙은 막내'를 더 고단하게 한다. 
한 예로 예전에 막내가 하던 허드렛일을 현재의 젊은 직원들에게 시키면 ‘퇴사 사유’가 된다. 대신 ‘까라면 까는’ 조직 문화에 익숙한 고참급 직원들에게 궂은 일이 몰린다. ‘부장들이 대리들 눈치를 봐야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까지 나온다. “과거엔 직급마다 할 일이 정해져 있고 직급별로 역할이 분명해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이 수월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무너져 조직 내 업무 노하우 전수 등도 어려워졌다.”익명을 원한 SK그룹 직원의 말이다.
 
세대별, 직급별 상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것도 달라진 조직 형태에 적응하려는 노력이다. 포스코그룹은 고참 직원들을 위해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유튜브 영상까지 제작했다. 롯데쇼핑은 경영진이 젊은 직원들에게 최신 이슈와 트렌드를 전수받는 ‘역(易) 멘토링 제도’을 운영하고 있다. LG화학은 신입 사원들이 임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토크쇼를 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사원들에게 브랜드 유치와 점포 운영을 맡긴 뒤 성공 사례를 공유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기업들은 더 나아가 기존의 수직적인 조직 구조를 보다 수평적으로 만들기 위해 조직을 손질하고 있다. 기존 '대리-과장-차장-부장'의 직급 체계를 '매니저'나 '프로' 등 단일 직급으로 묶어 단순하게 바꾼 SK그룹이나 신세계그룹 등이 대표적이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구성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다 보면 결국 조직의 활력이나 열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기업들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다양한 시도들을 계속하는 것은 물론, 연공서열 중심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기ㆍ이소아ㆍ강기헌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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