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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의 미래를 묻다] 암호화폐 기반 기술, 생활 속 민주주의도 꽃 피운다

중앙일보 2020.01.13 00:45 종합 20면 지면보기

4차산업 혁명 시대의 투표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축구를 하는데 심판이 없다면, 수능시험을 보는데 감독관이 없다면 어찌 될까. 심지어 선거를 치르는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큰 난리가 날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번 투표하는 것 같은 각종 부정행위의 가능성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금융거래를 처리하는데 중앙금융결제기관이 없다면 어떨까. 역시 큰 난리가 날 것이다.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이중지불의 위험성’이다. 한 사람이 여러 표를 행사하는 부정투표처럼, 1만원밖에 없는 사람이 1만원짜리를 두 개, 세 개 사는 것이다. 전자 금융거래에서는 중앙기구가 없다면 이런 이중지불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중앙기관이 없는데도 지난 10년 동안 이중지불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전자투표에 블록체인 결합하면
비용·보안·부정투표 문제 사라져
아파트 자치도 디지털 투표하는
‘일상의 민주주의화’ 실현 가능

일찍이 컴퓨터공학에서는 ‘중앙통제기관이 없으면 시스템이 사고 없이 스스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른바 ‘비잔틴 장군의 문제’다. 공격 전투부대들이 일사불란하게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황에 빗댄 표현이다. 이 문제를 금융 분야에서 제일 처음 해결한 게 비트코인이다. 중앙기관이 없어도 시스템 참여자들 스스로 금융거래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를 ‘탈중앙화’ 시스템이라고 한다. 블록체인 연구자들은 비트코인의 탈중앙화 성공 사례를 디지털 투표 분야에 적용해 보기 시작했다. 만일 블록체인에 돈을 보내는 ‘송금 의사 표시’를 넘어,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정치적 의사 표시’를 보낼 수 있다면, 오프라인 선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더 꽃피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디지털 투표로 의원 수시평가 가능
 
우리에게 익숙한 오프라인 투표에는 여러 한계가 있다. 우선 무효표가 많다. 4차산업 혁명을 외치는 시대에 아직도 투표할 때 잉크 번짐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 고비용이다. 4년마다 하는 국회의원 선거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선거운동 기간에는 트럭에서 열심히 연설하고 유권자들에게 고개를 조아리지만, 선거가 끝나면 그만이다. 학생들은 매 학기 시험을 보고 직장인들도 매년 평가를 받는데 국회의원은 4년에 한 번뿐이다. 선거 후에도 정기적으로 후속 투표를 진행해 민심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오프라인 투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생업이 있는 유권자 또한 투표하려면 기회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2018년 지방선거에 1조700억원이 쓰였다. 디지털 투표를 하면 이 비용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투표 기술이 발달하면 총선 후에도 자주 투표하고 평가해 수시로 민심을 전달할 수 있다.
 
셋째, 현재 오프라인 투표 방식에서는 투표권을 위임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나 원전·환경·의료·빅데이터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과제들을 일반 시민 투표나 공론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까. 디지털 투표에서는 내가 지지하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투표권을 위임할 수 있다. EOS란 암호화폐가 이런 식의 위임을 활용하고 있다.
 
넷째, 다수결의 한계다. 수학자 콩도르세는 다수결이 오히려 구성원의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투표의 역설을 지적했다. 대통령 후보가 3명 이상인 선거에서 경쟁이 치열해 33%대의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다면, 유권자의 3분의 2가 지지하지 않는 당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 의견이 희생될 수도 있다. 희귀병에 걸린 소수의 환자에게 정부가 신약 비용을 지원하는 것을 1인 1표 투표로 결정한다면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 에릭 포스너 교수는 1인 1표의 한계를 지적하며 개인이 투표할 때 마음의 강도를 반영할 수 있는 ‘제곱 투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예를 들어 시민 한 명에게 1년에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쿠폰 100장을 지급하는 식이다. 시민은 특정 사안에 한 표가 아니라 여러 표를 던질 수 있다. 대신 2표를 던지려면 쿠폰 4장(2의 제곱)을, 3표를 던지려면 9장을 소진해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불치병 환자와 가족들은 다른 투표 참여를 포기하더라도 신약 지원 투표에 더 많은 쿠폰을 사용할 것이다. 오프라인에서는 힘들지만, 디지털 투표 환경에서는 이 같은 방식도 쉽게 구현할 수 있다. ‘1인 1표’라는 보통 선거의 원칙 때문에 대선·총선 등에는 적용하기 어렵더라도, 각종 정책결정 투표에는 고려할 만한 방안이 아닐까.
 
이처럼 디지털 투표를 활용하면 오프라인 투표의 단점을 넘어 훨씬 창의적이면서 일상에까지 파고드는 투표를 만들 수 있다. 그래도 ‘비밀투표 구현’과 ‘보안 위험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큰 고민을 피할 수는 없다. 해킹 등으로 말미암아 선관위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위험이 있어서다. 선관위라는 중앙기관이 투표 자료를 모두 보유하는 한, 불가피한 고민이다.
 
중앙 컴퓨터(서버)가 없는 비트코인은 이런 걱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면서도 신뢰받는 금융거래 시스템을 구현했다. 디지털 투표를 고민하는 연구자들이 블록체인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다. (어쩌다 벌어지는 암호화폐 해킹은 ‘탈중앙화’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시스템에서 일어난 것이다.) 연구자들은 ‘투표 진행과 부정행위 검증을 중앙기관에만 의존하지 말고, 블록체인을 활용해 시민·정부기관·비정부기구·정당들이 함께할 수 있다면 새로운 차원의 신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블록체인 투표 체계 시동 건 한국
 
실제 이런 시스템이 하나둘 구현되고 있다. 스페인 스타트업 ‘엔보트(nVote)’ 등이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투표 시스템을 만들었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직접 블록체인 육성을 강조하며 블록체인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인민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까지 예고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은 정치에서까지 탈중앙화 가치를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 디지털은 중앙 중심의 통제 가능한 체제를 만들기 위한 도구다. 중국은 블록체인에서 민주주의의 실험을 할 수 없다.
 
한국은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다. 유엔(UN) 전자정부 평가에서 여러 차례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한국은 디지털 민주주의를 통해 작고 소소한 투표를 생활화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투표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시동은 걸었다. 선관위는 2013년 ‘K-보팅(Voting)’이라는 온라인 투표 플랫폼을 개발해 아파트 대표와 학생회장 선거 같은 생활 투표에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5년 만에 약 4000건 투표에 활용됐다. 그러나 중앙 서버 해킹 위험 등에 대한 구조적 한계 때문에 총선이나 지방 선거 등으로 확대하기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관위는 블록체인 투표 시스템을 연구했고, 최근에는 조달청을 통해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투표 시스템 관련 사업을 발주했다. 한국 디지털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로드맵이 될 것이다.
 
스페인에선 공천에도 디지털 투표 활용
스페인 업체 엔보트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만든 디지털 투표 설명 화면. [엔보트 홈페이지 캡처]

스페인 업체 엔보트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만든 디지털 투표 설명 화면. [엔보트 홈페이지 캡처]

디지털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스타트업 ‘엔보트(nVotes)’가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투표 시스템을 개발, 상용화해 학교·협회·재단 등에 제공하고 있다. 이 시스템을 제일 잘 활용한 곳이 포데모스 정당이다. 2014년 창당한 지 100일 만에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스페인에 할당된 54석 중 5석을 차지했다. 이듬해 스페인 총선에서는 원내 제3정당이 됐다.
 
포데모스가 돌풍을 일으킨 원인으로는 강력히 ‘반부패’를 내세운 것과 집권 세력의 경제정책 실패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블록체인 디지털 투표를 활용한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포데모스는 엔보트가 제공한 ‘아고라 투표 시스템’을 운영한다. 포데모스 지지자라면 누구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를 통해 정책 방향부터 주요 당직자 선출, 공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안에 대해 지지자들이 직접 투표하고 포데모스는 그 결과를 따른다. 아예 시민이 투표할 공식 안건을 제안하는 온라인 시스템까지 갖췄다. 안건에서 방향 결정까지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모델이다.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다.
블록체인
데이터를 여럿이 함께 기록하고 저장하는 기술이다. 비트코인에서는 매 10분 마다의 거래 기록을 장부로 만든다. 각각의 장부를 ‘블록’이라고 한다. 블록들은 암호화된 체인으로 연결된다. 이 가운데 어느 장부 하나의 거래 기록을 해킹해 바꾸면, 다른 장부에까지 줄줄이 이상이 생겨 쉽게 위·변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실상 해킹이 불가능하다.
◆김문수 교수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에서 블록체인이 사회와 경제·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가르치는 ‘크립토MBA’ 주임교수다. 서울대 공대 응용화학부를 졸업하고 aSSIST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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