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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돌연 "미군기 오인해 여객기 격추"…증거에 발뺌 못했다

중앙일보 2020.01.11 15:36
우크라이나국제항공 소속 보잉 여객기가 지난 8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국제공항에서 이륙 직후 추락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응급구조대원들이 사고기의 잔해 주변을 수색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국제항공 소속 보잉 여객기가 지난 8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국제공항에서 이륙 직후 추락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응급구조대원들이 사고기의 잔해 주변을 수색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란이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를 시인하면서 중동 정세가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다. 이란 합동참모본부는 11일 이란 국영TV를 통해 “지난 8일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적기로 오인해 격추시켰다. 사람의 실수였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의 방공시스템이 사고기를 적기로 오인해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로하니 대통령도 "재앙적인 실수였다"
기체결함 주장하다가 증거 나오자 돌연 시인
"트럼프 유화 제스처에 발표 결심한 듯"
美 핵 협상 등에 돌파구 될 수도…

이란 합참은 성명에서 “(이란이 8일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공격한 직후) 이란군은 고도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미군 전투기가 우리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첩보를 보고받는 등 민감한 상황이었다”면서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이란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의 군사 거점 방향으로 향했기 때문에 부주의로 격추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사고가 “인재”란 점을 강조하면서 “유가족에게 추도와 사죄를 표명한다”고 덧붙였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이날 트위터를 통해 “이란 정부는 이번에 발생한 재앙적인 실수를 깊이 후회한다”며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란 군 당국은 이런 사실을 사고 직후부터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란은 지금까지 기체 결함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란이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은 격추 관련 증거들이 속속 등장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뉴욕타임스 등은 목격자들이 촬영한 동영상 등을 근거로 사고기가 이란의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격추 가능성을 의심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 관계자 등도 언론에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 
 
뉴욕타임스가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에서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되는 장면으로 추정되는 영상을 지난 9일 공개했다. 영상에는 이란의 지대공미사일로 알려진 물체(사진 맨왼쪽 적색 원안)가 상공을 날아가다 기체와 충돌에 섬광(사진 가운데)이 나타나는 모습이 포착됐다. 피격된 여객기는 영상 왼쪽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몇 차례 깜빡이다 하늘에서 사라졌다. [뉴욕타임스 캡처=뉴스1]

뉴욕타임스가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에서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되는 장면으로 추정되는 영상을 지난 9일 공개했다. 영상에는 이란의 지대공미사일로 알려진 물체(사진 맨왼쪽 적색 원안)가 상공을 날아가다 기체와 충돌에 섬광(사진 가운데)이 나타나는 모습이 포착됐다. 피격된 여객기는 영상 왼쪽방향으로 방향을 틀어 몇 차례 깜빡이다 하늘에서 사라졌다. [뉴욕타임스 캡처=뉴스1]

미국 정부도 이런 사실을 토대로 이란 측에 사고기에서 회수한 블랙박스 내용 공유 등 사고 조사 참여를 줄곧 요구해왔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이번 사고로 캐다나인 57명이 사망한 것과 관련해 지난 9일 “이란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란 군 당국이 국방이나 안전보장 관련 사안에서 기존 주장을 철회하고 사죄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너무나 객관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고’라는 주장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장은 “너무 엄청난 일을 저질러서 있는 그대로 발표하기엔 겁이 났을 것”이라면서 “(이미 상황을 파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실수’라고 표현하는 등 다소 유화적으로 나오자 더 이상 끌고 가기엔 부담이라고 판단해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사고로 국제사회의 비난은 물론 중동 내에서도 이란의 입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지적된다. 다만 보상 처리 등을 놓고 이란과 희생자를 낸 서방 국가들이 협상에 나서야 하는 만큼 ‘이란 위기’를 풀어낼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은 지난 8일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 이후 추가 경제제재 조치를 단행하면서 이란에 새로운 핵합의를 위한 협상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일각에선 이란이 실수를 인정한 만큼 미국과의 협상에도 전향적으로 나설 수도 있다고 본다. 악재이지만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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