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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배운 어미는 밤새 울었다···괜찮다, 이제 엄마도 중학생이다

중앙일보 2020.01.11 06:00
구석구석 살펴봐야 빛나는 것들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도 그렇다. 먹고 살아야 해서, 삶에 쫓겨 평생 한글을 배우지 못해 살았던 할머니들에게 뒤늦은 한글 공부는 찬란한 기쁨이 됐다. 
서울도서관이 지난 8일부터 1층 기획 전시실에서 할머니들의 서툰 글씨로 써내려 간 이야기를 담아 '내 인생의 첫번째 책' 전시회를 열고 있다. 

서울도서관, '내 인생의 첫번째 책' 전시회
문해프로그램으로 늦깍이 공부한 할머니들
가족에 대한 사랑 담아 꾹꾹 눌러 쓴 시화

진솔한 이야기 속엔 고단했던 삶과 현재의 기쁨이 고스란이 녹아 있다. 전시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글을 일부 발췌했다. 
서울도서관에서 이달 31일까지 뒤늦게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정성들여 만든 '내인생의 첫책'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도서관에서 이달 31일까지 뒤늦게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이 정성들여 만든 '내인생의 첫책' 전시회가 열린다.

 

 
이순임 할머니의 시화

이순임 할머니의 시화

"아들과 내" 
                    이순임
내 지난 세월은 험난했다
그래도 아둥바둥 자식 낳고
살림살이 장만하고
조금씩 늘어가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었다
자식들 자라는 보람에 살았다
 
배우지 못한
창피하고 쑥쓰러웠던 어미
자식들만이라도가르치겠다고 다짐하지만
남들은 학원도 독서실도 다니는데
아들이 독서실만이라도 애원했다
 
파출부 해서 내민 돈 받고
엄마 고맙다고 인사했다
밤새 소리 없이 울었다
괜찮다 괜찮다
이제는 엄마도 중학생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줘 써내려간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마음은 한 곳으로 모아진다. 가족이다.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조옥자 할머니의 '나의 아버지'.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글을 써내려간 김대남 할머니는 "당신이 배우지 못해 탓하지 않아서 행복했다"고 적었다. 이정임 할머니는 손녀를 '나팔꽃'이라 부르며 "고운 이슬"이 되어주마라고 약속했다. 오홍숙 할머니는 "고등학교까지 가라"는 아들의 응원과 "산수를 가르쳐주겠다"는 손녀의 기특한 마음까지 정성들여 적었다. 
 

 
 
조옥자 할머니의 '나의 아버지'

조옥자 할머니의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조옥자
 
글을 몰라서 나의 아버지께 내 마음을 못전해씀니다
지금은 야학에서 글을 배워 못 전한 마음 전합니다
내가 어릴 때 의용군으로 가신
나의 아버지 이름 석자만 남기신
나의 아버지 얼굴도 기억에 없는
나의 아버지 유해라도 찾으려니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내 평생 소원인 나의 아버지
아버지 소식은 못라도 제사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 하늘에 별이 되셨는지요
꿈에라도 보고 싶은 나의 아버지
 
 
 
 

 
 
 
김대남 할머니의 '보고 싶은 당신'

김대남 할머니의 '보고 싶은 당신'

 보고 싶은 당신
                  김대남
 당신을 그리워 하며 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여보 잘계시지요? 당신이 배우지 못했다고
탓하지 않아서 행복하기만 했어요
당신한테 배워도 되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니
무슨 소용있겠어요.
그래서 나는 한글 공부를 하고 싶어
복지관에 다니고 있고 글도 잘쓰게 되었어요.
당신이 말 할때마다 우리가 아이들 나쁜소리
듣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들,딸,손녀 손자가 생겨 당신 꿈은 이루어졌어요
당신은 앞에 갔지만 지금도 여러분들이 박사장
참 좋은 분이셨다고 그렇게 빨리 가셨다고 할때
마다 마음이 뿌듯했어요 이제는 걱정마세요
그리고 사는 날까지 살다 당신 옆으로 갈게요
 

 
 
이정임 할머니의 '나팔꽃 손녀'

이정임 할머니의 '나팔꽃 손녀'

나팔꽃 손녀
                           이정임
나의 손녀 경민이는 
나팔꽃잎
만지면
야들 야들
보들 보들
아침 저녁 구별 없이
나팔을 분다
햇님과 함께 깨어나는
목소리는
줄기마다 타고 오르는
경민의 노래
동네방네 일어나라
세상을 깨우는 
귀여운 함성
밤마다 할미는
고운 이슬이 되어줄게
 
 
 

 
 
오홍숙 할머니의 '아들의 미소'

오홍숙 할머니의 '아들의 미소'

아들의 미소
                오홍숙
뒤늦게 
학교문 두드린 용기
내마음 대견하다
 
오늘도
책상앞에 앉아있다
보고 또 보고 새롭기만 하다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느껴진다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공부해서 좋으시죠?
미소로 대답했다
 
어머니!
열심해 해서 고등학교까지 가세요
그래야지
내 마음 흐뭇하고 최고로 기뻤다
 
아홉살 손녀가 거든다
할머니!
모르는 산수 언제든지 물어보라 한다
 
후원자가 많아서
내 마음 더욱 더 큰 행복이 밀려온다
아들은 소리 없이 웃고 있다
 
 

 
읽다보면 콧잔등이 시큰해져온다. 재치발랄 글을 읽다보면 웃음도 절로 난다. 숱 많은 검은 머리가 이뻐 얻은 이름 '입분'. 김입분 할머니는 "사는 건 이쁘지 않았다"고 적었다. 김 할머니는 "평생 소원이 글 배우고 글자연습 열심해 해 손주에게 편지쓰는 입분 할머니, 이름처럼 이쁘게 살아야지"라고 했다.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워 "참 행복하다"고 했다.  장이선 할머니는 '아름다운 나의 삶'이란 글에서 "학교 가는 길이 꿈길 같다.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서울시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문해학습 활성화 사업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이 교육 사업에 참여한 할머니들의 책 158권과 시화로 꾸며졌다. 전시회는 오는 31일까지 이어진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김입분 할머니의 '이쁘게 살아야지'

김입분 할머니의 '이쁘게 살아야지'



이쁘게 살아야지
                    김입분
숱 많은 검은 머리 이쁘다고
지어주신 내 이름이 김입분
이름만 이쁜이지
사는 건 이쁘지 않았네
어릴 땐 형제들 뒤치다꺼리
어른되어선 자식들 챙기느라
학교도 가보지 못하고
자신없이 살았지만
이젠 이름처럼 이쁘게 살아야지
숱많던 머리는 숭덩숭덩 빠져있고
마디마디 굵은 주름
구부러진 손가락이 되어버렸지만
이젠 이름처럼 이쁘게 살아야지
평생 소원이 글 배우고 글자연습 열심히 하여
손주에게 편지쓰는 입분할머니
이젠 이름처럼 이쁘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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