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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한국 금융 망친 세 명의 악당

중앙일보 2020.01.09 00:46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국 금융에는 세 명의 악당이 있는데 청와대, 노동조합, 금융 당국이다. 이들이 돌아가며, 또는 뭉쳐서 사고를 쳐대는 통에 한국 금융이 우간다 수준이란 소리를 듣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윤종원 기업은행장 출근 저지는 하나의 본보기다.
 

낙하산 인사에 반발하는 노조에
청와대 “국정 철학 잘 아시는 분”
밥 먹여주는 건 이념 아닌 실력

우선 노조. 기업은행 노조는 윤 행장의 출근을 6일째 막고 있다. 막아선 이유도 고전적이다. 메인 제목은 “낙하산 보은 인사 반대”, 부제는 “금융 전문성 부족”이다. 김형선 노조위원장은 “청와대 수석 일자리 만들어주기 인사”라며 “(윤 행장은) 자진 사퇴하라”고 다그쳤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10년간 이어 온 내부승진 전통이 깨진 충격이 컸다”고 했다.
 
기업은행만이 아니다. 이 정부 들어 국책은행장 임명 반대 투쟁은 노조의 단골 메뉴가 됐다. 2년여 전 KDB산업은행 회장이 된 이동걸씨는 4시간여의 노조 면담을 통과한 뒤에야 집무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은성수 전 수출입은행장은 1주일이 걸렸다. 국책은행장에 내정된 인사에게 “노조가 통과의례를 치를 테니, 꾹 참고 며칠 잘 견디라”는 덕담은 필수가 됐다고 한다. 노조는 출근 저지로 CEO를 길들이고, 노동추천이사제나 인력 구조조정 불가, 처우 개선 약속 등을 얻어낸다. 그러니 이런 은행에 무슨 경쟁력이 생기겠나.
 
청와대도 면목 없게 됐다. 한국 금융을 다시 크게 후퇴시켰다. 기업은행의 내부 승진 전통은 이명박 정부 때 시작됐다. 그 전까지는 재무부 출신이 독차지했다. 2010년 조준희 전 행장을 시작으로 2013년 권선주, 2016년 김도진 전 행장까지 세 번 연속 내부 승진했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이 적임자로 추천됐지만 청와대 내부에서 논의 끝에 권선주 전 행장이 최종 낙점됐다”고 했다. 그는 “권 전 행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별 인연이 없었다”며 “권 전 행장을 앉힌 것은 네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첫째, 이명박 정부 때 지인을 금융지주 회장에 앉혀 ‘4대 천왕’ 논란이 컸다. 한국 금융을 20년 후퇴시켰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런 전철을 밟지 말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둘째, 내부 승진 전통을 지켜 주자. 조준희 전 행장에게 후임을 추천하라고 했다. 그가 “권선주가 적임자”라고 했다. 셋째, 권 전 행장은 전북 출신이다. 지역 화합에도 맞는다. 넷째, 여성 은행장이 딱 필요한 때였다.
 
지금 정부와 여당은 야당 시절 보수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관치’ ‘독극물’이라며 적폐 취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낙하산 인사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놓고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니 따라 했다.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노조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고 비난할 만하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분들은 정부의 국정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밥은 국정철학이 아니라 실력이 먹여준다. 은행장에게 필요한 건 실력이지, 이념이 아니다. 기업은행 직원에게 “나도 행장이 될 수 있다”는 꿈을 뺏은 건 덤이다.
 
금융 당국도 유구무언이다. 청와대의 낙하산 인사에 맹종해 은행의 선진화를 막고 금융을 관치의 굴레에 밀어 넣었다. 윤종원 행장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윤 행장은 친문 실세도, 586 핵심도 아니다. 전문 관료로 경제수석을 맡았다. 청와대 실세들과 반목설이 돌면서 1년 만에 물러났다. “경제수석이 장관으로 영전하지 않거나 후직 없이 그만두는 것은 사실상 경질로 봐야 한다”는 게 통설이다. 그런 윤 전 수석까지 은행장이란 따뜻한 자리를 챙겨줌으로써 청와대는 “내 편은 챙긴다” “한번 인연은 잊지 않는다”는 조폭식 의리를 과시했다. 그러니 항간에서 윤 행장 임명을 정권 내부 단속·결속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네편 내편만 따진 결과, 한국 금융이 오늘도 우간다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알면서 방조한 금융 당국의 책임이 무겁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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