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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가족에 보여주기 아닙니다, 행복하려 연기해요”

중앙일보 2020.01.09 00:03 종합 19면 지면보기
지난 2013년 열세 살 나이에 탈북해 한국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은 유혁은 오는 3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다. 지난 3일 졸업한 탈북 청소년을 위한 여명학교 교실에서 누운 자세로 웃음 짓고 있다. 장진영 기자

지난 2013년 열세 살 나이에 탈북해 한국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은 유혁은 오는 3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다. 지난 3일 졸업한 탈북 청소년을 위한 여명학교 교실에서 누운 자세로 웃음 짓고 있다. 장진영 기자

“북한에서도 한국 방송을 많이 봅니다. 사실 TV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지금은 그냥 유명한 사람 말고 관객들을 웃고 울리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습니다.”
 

서울예대 연영과 진학하는 유혁
13살 때 배고픔에 지쳐 탈북
“한국생활 7년간 싸우면서 변해
내 연기에 사람들 웃을 때 행복”

지난 2013년 탈북해 남한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은 유혁(20)의 소망이다. 홀로서기를 통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지난 3일 탈북 청소년을 위한 ‘여명학교’를 졸업했다. 오는 3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예정이다. 유혁은 “연극영화과 진학을 준비하면서 여러 무대에 서봤다. 내 연기를 보고 사람들이 웃고 박수쳐 줄 때 살아있다는 쾌감이 느껴졌다”며 ‘마음을 전달하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의 2000년생 유혁은 아홉 살 때부터 어리광 대신 가장의 역할을 짊어져야만 했다. 배고픔이 악착같이 소년을 따라다녔다.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 이혼해서 따뜻한 엄마의 품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연로하신 할머니와 항상 술에 빠져 있는 아빠 대신 절벽에서 버섯을 캐서 팔기도 했고, 군인들 심부름을 하며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죠. 너무 배고팠어요. 물만 마시며 8일을 버틴 적도 있어요.”
 
생활고에 지친 열세 살 소년은 나고 자란 북의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먼저 탈북한 엄마와 이모를 통해 연락이 왔다.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갔다.
 
“널빤지만한 작은 배로 강을 건넜고 이름 모를 산을 수없이 넘었습니다. 주먹밥과 초콜릿 몇 개로 버티면서요. 배고픔보다는 붙잡혀 다시 북으로 끌려가는 게 가장 두려웠어요. 단도를 품에 지니고 다녔고, 일이 잘못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습니다.”
 
한 달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책임도 주어졌다. 하나원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쳤다. 솔직히 공부는 어려웠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선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착이 쉽지만은 않았다.
 
유혁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마음속에 답답함이 많았다.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많이 싸웠다. 생각해 보니 아픔이었던 거 같다”고 했다. 그를 붙잡아준 건 학교 선생님들이었다. 그는 “선생님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네가 변해야 주변에 사람들이 남는다’고 말씀해주셨다. 진심이 느껴졌다. 부모님께도 받지 못했던 관심을 받으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쁜 생각을 하다가도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생각을 고쳐 먹었다”고 털어놨다.
 
유혁을 지탱해준 또다른 버팀목은 랩과 연기다. 그는 “한국에 왔을 때 힙합을 많이 들었다. 거친 멜로디인데 가사가 왠지 내 마음 같았다. 마음속에 어지러운 감정들이 랩 가사를 쓰면서 많이 편해졌다. 전에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랩을 쓰면서 다른 사람 마음에 공감하게 됐다”고 했다.
 
연기를 할 때도 행복하단다. “사람들이 내 연기 모습을 보고 웃을 때 행복해요.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행복인 거 같아요.”
 
한국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은 유혁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것에 너무 감사하고, 앞으로도 힘들 일이 있겠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항상 날 믿어. 고마워.”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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