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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버지가 주신 ‘로또’가 당첨되길 바라는 이유

중앙일보 2020.01.08 15:00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1)

 
“고생 많았다. 새해에도 힘든 일 많겠지만 감내하고 이겨내라. 나 자신에게는 지독할 만큼 철저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고 여유 있게 하고, 우리 올 한 해도 오순도순 재미나게 살자.”
 
새해 아침 아버지께 세배를 올렸다. 무릎 꿇고 덕담을 듣는데 눈물이 핑 돈다. 아버지 말씀은 물 젖은 스펀지 같다. 같은 이야기도 아버지가 하시면 찡하다. 오순도순 살자는 말씀에 어젯밤 기름기 안 닦인 그릇을 깨끗한 그릇 위에 엎었다고 신경질 냈던 것이 괜스레 찔리면서.
 
아버지 호랑이와 딸 호랑이, 서른여섯 띠동갑인 아버지와 나는 가족 중 가장 쿵짝이 잘 맞는 짝꿍인데, 어째 둘이 살면서 38년 호랑이는 점점 심약해지고 74년 호랑이는 점점 성질이 못돼진다. 아버지는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꼭 “1잔 타서 둘이 나눠마시자” 하실 정도로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하려 하신다. 출근할 때면 “오늘 날씨가 춥다” 하시며 뒤통수에 대고 일기예보도 해 주시고, “목도리를 해라, 모자를 쓰면 좋겠다” 잔소리도 잊지 않으신다. 퇴근이 늦는 날이면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시다 내가 대문 열고 들어가면 그제야 “올 사람 다 왔으니 나는 이제 자야겠다” 하며 방에 들어가신다.
 
아버지가 평균 쓰시는 용돈은 한 달에 10만원가량. 교통비 외에는 4500원 담배를 일주일에 2갑, 그리고 교회 헌금이 대부분이다.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용돈도 즐겁게 쓰셨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아끼고 또 아끼신다. 아버지 씀씀이가 줄어드는 만큼 삶의 범위도 쪼그라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새해 첫날에는 한 해의 기도제목을 교회에 제출한다. 아버지의 2020년 기도제목 세 가지엔 모두 ‘딸들’이 담겨 있었다. [사진 푸르미]

새해 첫날에는 한 해의 기도제목을 교회에 제출한다. 아버지의 2020년 기도제목 세 가지엔 모두 ‘딸들’이 담겨 있었다. [사진 푸르미]

 
저녁은 외가댁에서 친척들과 함께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외삼촌은 바퀴 달린 보조의자 힘을 빌려 상 앞에 앉으셨고, 몇 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 큰이모는 “아이고, 누구 생일인가? 식구들이 많이 오네” 하시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셨다. 스무 명도 넘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큰이모는 단 한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우리 엄마는 딸을 내리 셋 낳은 뒤 막내는 틀림없이 아들일 텐데 병원에서 낳으면 혹여 아이가 바뀔까 염려하여 친정에서 나를 낳았다. 그때 산파 역할을 한 분이 큰이모다. 이모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은 날 보고도 “아이고 낯은 익은데 누꼬?” 하며 배시시 웃으셨다.
 
모두가 놀란 건 이모의 노래였다. 어머니 이름조차 잊어버린 이모가 음정과 박자, 가사 한마디 안 틀리고 정확하게 노래를 부르셨다. 그 목소리가 참으로 곱고 맛깔나 눈물이 났다. 홍난파 작곡 우리 가곡 ‘봉선화’로 출발한 노래는 아일랜드 민요를 번안한 ‘아 목동아’에서 절정을 이뤘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아낌없이 쏟아지는 박수에 기분 좋으셨는지 “노래한 지 영 오래 되었어예” 하시며 수줍어하면서도 다음 노래로 바로 또 넘어가곤 했다. 레퍼토리가 반복되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가사와 음정이 정확했다.
 
자신보다 세 살밖에 많지 않은 누이를 지켜보던 외삼촌은 “나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 하시며 애닳아 하셨다. 그 와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아버지의 정수리였다. 새로운 장소와 조명 밑에서 봐서인지 눈에 띄게 허술해진(?) 것이 아닌가. 숱이 많진 않지만 분명 대머리는 아니신데,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꺾어지는 부분에 머리 속살이 훤했다. 빛이 반사되어 그런가?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에구, 이런!’ 실화였다.
 
“모자를 오래 쓰셔서 그럴 거야.”
 
외숙모가 놀란 내 표정을 보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 머리카락을 빗어 드리는 척하며 직접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 속상한 마음에 “아빠, 머리 뒤쪽이 왜 이렇게 많이 비었어요?”하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머리숱 많아 뭐하냐?” 하시는 거다. 어이없어하는 나에게 한술 더 떠 “유심히 보니 다들 그렇더라. 아예 없는 사람도 많은데 나이 많은 사람이 머리숱 많은 것도 난 이상 터라” 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가 스스로 변화를 인지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동안, 등잔 밑이 어두운 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울릴 것 같은 모자를 발견하면 그걸 사다 씌워드렸을 뿐 그 후의 변화까진 살피지 못한 것이다.
 
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손녀가 그린 그림. 여든이 넘으셨지만 그 키와 비율은 여느 청년 못지않다. 어린 손녀가 보기에도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손녀가 그린 그림. 여든이 넘으셨지만 그 키와 비율은 여느 청년 못지않다. 어린 손녀가 보기에도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세뱃돈이다!” 하면서 내 손에 종이 하나를 쥐여주셨다. ‘로또’였다. “꼭 당첨될 것이니 잘 간수해라”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꾸준히 복권을 사시는 아버지를 말리진 않지만, 그것이 당첨될 수도 있다는 확신까진 갖지 못했는데, 이번 만큼은 꼭 당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돈이 생기는 것도 물론 기쁘겠지만, 삶의 모든 초점을 딸들에게 맞추고 사는 우리 아버지, 새해 첫날 사랑하는 딸에게 선물한 로또가 당첨되었다 하면 얼마나 기분 좋으실까? 그 믿지 못할 기쁨이 아버지 삶에 새로운 활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추신: 새해 첫날 아버지가 선물한 로또는 4일 추첨 결과 5등 (5000원)에 당첨되었다. 미약하지만 다음 주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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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 푸르미 공무원 필진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 아버지와 10년째 동거 중인 20년 차 공무원. 26년간 암 투병 끝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했다. 팔순을 넘어서며 체력과 인지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아버지를 보며 ‘이 평화로운 동거가 언젠가 깨지겠지’ 하는 불안을 느낀다. 그 마음은 감춘 채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버지에게 얹혀살고 있다”고 주변에 이야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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