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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본능 재우고 공격충동 깨웠다···트럼프 확 바꾼 배후 정체

중앙일보 2020.01.08 05:0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측근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대표적인 이란 매파인 그레이엄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보복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측근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 대표적인 이란 매파인 그레이엄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보복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EPA=연합뉴스]

 
#2019년 6월 20일 오전 7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내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집무실에서 참모들과 조찬 회의를 했다. 몇 시간 전 이란이 미국 공군 무인기를 격추한 데 대한 보복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트럼프, 6월 이란 공격 10분 전 취소
이번엔 이란 '2인자' 제거 명령 승인
6개월 새 확 바뀐 이유는…

공화당 이란 매파들 설득에 넘어가
탄핵 공조 위해 공화당 의견 경청
이란 대담한 도발 '레드 라인' 넘어
클린턴도 탄핵 전 후세인 공격 승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대행 등 참모들이 트럼프 앞에 다양한 군사적 옵션을 제시했다. 격론 끝에 이란 미사일 포병 중대와 레이더 기지 세 곳을 공격 목표물로 정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트럼프가 마음을 바꿨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폼페이오, 볼턴 등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국방부에 작전 취소를 명령했다. 부통령 일행은 군사 작전을 지켜보기 위해 이날 저녁 백악관 상황실에 모인 뒤에야 상황을 알게 됐다. 
 
미 해군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함은 미사일 발사 준비를 마치고, 전투기는 상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공습 개시 10분을 남기고 벌어진 일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보도했다. 신문은 "트럼프는 실탄을 들고 진짜 전쟁터에서 싸우는 걸 주저한다는 걸 증명했다"고 진단했다.  
 
#2020년 1월 2일 미 공군 소속 무인기 MQ-9 리퍼는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을 막 빠져나온 이란 군부 실세 차량에 미사일을 쐈다. 이란 내 2인자로 불리는 거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정예부대(쿠드스군) 사령관과 일행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미 국방부는 “트럼프 대통령 지시로 미군이 솔레이마니를 사살했다”고 밝혔다.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나흘 전인 지난해 12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이 휴가 중이던 플로리다주 리조트에서 구체화됐다. 상당 기간 솔레이마니의 행적에 대해 보고를 받아 온 트럼프 대통령은 리조트에서 전화로 공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6개월 만에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 행정부가 주장하는 근거는 정당방위다.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이란의 공격이 임박해 정당방위 차원에서 솔레이마니를 제거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공격 임박의 구체적인 정황은 제시하지 않아 정당방위 성립 여부에 대한 논란은 계속 커지고 있다. 국무부는 “임박한 위험”을 언급했지만, 국방부는 “미래에 닥칠 위험”이란 표현을 써서 의구심을 더욱 키웠다.
 
워싱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는 수사(修辭)보다는 ‘전쟁 회피론자’인 트럼프 대통령이 6개월 사이에 판단을 바꾼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외교정책의 근본적 변경인지,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의 결과인지에 따라 사안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비핵화 협상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될 수 있다.
 
트럼프는 지난해만 해도 여러 이유를 들며 이란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걸 피했다. 군사력 사용을 싫어하는 본성, “끝없는 전쟁을 끝낼 때가 됐다”고 한 대선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국제유가가 출렁거려 경기 침체를 촉발하면 대통령 재선이 막힐까봐 등이 이유로 거론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확 바뀌었다. 우선, 이란의 도발이 더욱 대담해지고, 핵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려는 단계까지 갔다. 이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본ㆍ노르웨이 유조선을 공격하고, 공해 상에 있는 미군 무인 정찰기를 격추한 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 유전과 석유 시설을 공격해 세계 원유생산량의 5%를 감소시켰다.
 
WP에 따르면 외교·안보 참모들은 플로리다에서 이란의 계속되는 도발에 트럼프가 대응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그들은 뭘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참모의 의견보다는 독자적 판단을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공화당 소속 대이란 매파 성향 인사들이 나서자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탄핵 사태를 헤쳐 나갈 때 필요한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린지 그레이엄, 톰 코튼 상원의원 등이다.
 
지난 6월 트럼프의 '후퇴'에 불만을 가진 공화당 매파들은 이란의 공격이 점점 대담해지자 자신들의 우려가 정당하다고 믿게 됐다. 이들은 트럼프와 사적으로 대화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입했다고 CNN은 전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안에는 ‘고립주의적 본능(isolationist instinct)’과 ‘공격 충동(aggressive impulse)’이 공존하며 싸운다고 본다. 어느 날은 "적을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말했다가 다른 날은 "중동에서 미군을 집으로 데려오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혼선이 이를 잘 보여준다. 
 
공화당 매파는 대통령이 고립주의적 본능을 버리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다. 한 공화당 의회 보좌관은 CNN에 “미국이 초강대국처럼 행동할 때 미국인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대통령이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의 일련의 도발이 ‘레드 라인’을 넘었기 때문에 트럼프가 결국 반격을 선택했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말 이라크 내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공격으로 미군 4명이 다치고 민간인 1명이 사망한 사건에 이어 바그다드의 미국대사관이 불타는 시위 장면을 보고 트럼프가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군사 옵션 가운데 트럼프가 '솔레이마니 제거'라는 가장 센 보복을 직접 선택하자 참모들도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작전으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란이 핵 합의를 위해 협상에 나올 생각을 안 하자 트럼프가 충격 요법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는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체결된 이란 핵 합의를 2018년 5월 파기하고 이란과 재협상을 원했다. 
 
지난해 9월 하산 로우하니 이란 대통령이 뉴욕 유엔총회에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할 수 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불발됐다. 트럼프는 협상을 제안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이란은 “트럼프에게 사진 찍을 기회만 주는 일은 하지 않겠다”면서 거절했다.
 
트럼프는 지난 6월 공격 명령 취소 이후 부정적인 언론 반응에도 상당히 신경 쓴 것으로 알려졌다. 뒤로 물러서는, 약한 이미지로 비치는 것과 워싱턴 동지들이 실망하는 모습도 마음에 걸려 했다고 CNN은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측근인 폼페이오과 그레이엄 의원은 대표적인 대이란 매파로, 군사적 공격을 지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곧 시작될 미 상원의 탄핵심판에서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탄핵안을 하원에서 상원으로 넘기는 문제로 치열하게 싸우다 지난해를 마감했다. 지난 3일 의회가 개원하면서 공방은 재개됐으나 언론과 여론의 관심은 온통 이란과의 갈등 확대로 옮겨가면서 탄핵 담론은 쑥 들어갔다.  
 
과거에도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해외 공습을 승인한 사례도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8년 12월 하원 탄핵안 표결 직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승인한 사례와 현 상황이 비슷하다고 USA투데이는 전했다. 
 
당시 야당인 공화당은 탄핵에 대한 정치적 주목도를 낮추기 위한 꼼수라고 비판했는데 이제는 민주당이 트럼프가 이란에 대한 공격을 강행한 시점이 “왜 지금이냐”고 의문을 표하고 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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