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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영혼의 여정

중앙일보 2020.01.08 00:58 종합 28면 지면보기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처음에는 예상 못 한 허탈감에서 시작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준비했던 대학에 입학했다거나,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다거나, 드디어 그토록 찾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허탈하고 두 가지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성취의 즐거움이 하루하루 일상의 고단함으로 생각보다 빨리 교체된다는 사실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꿈꾸던 직장을 얻고, 결혼할 좋은 사람을 만나도 예상보다 빨리 적응하면서 당연하다는 생각과 이미 다 안다는 느낌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은 없는지 계속 찾게 됩니다.
 

인간 따라다니는 불안과 외로움
무상함은 영성의 성장 가져다줘
연극 같은 삶속의 나를 깨닫게 해

뭐 이러면서 사람이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찾기만 하다가 내 인생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더불어 왜 외부적인 성취가 궁극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올라옵니다. 특히 지인이 갑자기 암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비보를 들을 때마다 “나도 어쩌면” 하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당연시하면서 추구해온 부나 명성·사랑·아름다움이 죽음 앞에선 다 무상하다는 느낌과 함께 무상함을 넘어서는 다른 길은 없는지 찾게 됩니다.
 
두 번째의 불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과 불안입니다. 그 감정들의 근본 원인은 세상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 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크게는 세계 경제나 기후, 정치적 상황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고, 작게는 내 가족의 마음이나 내 마음도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몸도 내 생각대로 조정할 수 없고, 내가 이 정도 했으니 상대도 이 정도는 해주겠지 하고 기대를 했는데 상대가 그 기대를 저버린다거나, 아니면 관계에서 배신을 당할 때마다 외로움과 불안감을 느낍니다. 결국 누구에게 의존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그 누구도 나를 오랫동안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특별한 영혼은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시작합니다. 삶이라는 연극 안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연극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과 패턴을 이해해서 연극이라는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합니다. 특히 삶의 고통이 극심했을 때나, 더 이상 남에게 의존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동안 무시해왔던 인생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할 때, 우리의 영혼이 잠에서 깨어난 듯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진 인생이라는 연극 속에 빠져서 주인공으로만 살았는데 이제부턴 한 발자국 물러나 관객의 시점에서 연극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이 지점에서 자신에게 큰 가르침을 줄 종교나 스승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찾은 종교나 스승이 좋은 깨달음을 주기도 하지만 어느 땐 자유가 아닌 자유라는 이름의 또 다른 속박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스승도 연극 속 하나의 배역임을 보면서 결국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연극 안 그 무엇과도 동일시하지 않아야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 삶이라는 연극을 관객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볼수록 깨달음이 생깁니다. 먼저 연극 안의 주인공을 비롯한 모양 있는 여러 배역들은 나이가 들고 변화하지만, 연극이 펼쳐지는 모양 없는 (의식) 공간만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나를 연극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면 내가 삶 안으로 들어가서 인생 드라마를 펼치면서 사는 것 같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드라마가 (의식) 공간 앞에 잠시 나타났다가 계속해서 변하면서 사라지는 환영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더 깊어지면 이제는 더 이상 연극 속 주인공의 몸이나 감정, 생각에 집착이 사라지면서 마치 내 의식이 텅 비어 사라진 듯 놀라운 자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집착이 없기에 어느 곳에도 나라고 할 것이 없지만 동시에 온 세상과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불어 모양이 없는 이 의식은 더럽히거나 훼손될 수 없고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도 있었고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온 영혼은 연극 속으로 들어가 다른 존재들과 동고동락하지만, 연극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들을 도와줍니다. 도와준 이도, 도움을 받은 이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자유롭게 연극을 합니다.
 
혜민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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