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규 경제디렉터
‘불황형 감원’ 임원 30% 줄어
경제성장 게걸음에 규제 여파
60년대 후반생, 동료·상사에 치여
경제 이끄는 밀알 … 포기 말아야
# 임원에 오르지 못한 부장을 만난 건 며칠 뒤였다. 식사 장소로 가는 동안 내내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인사 얘기는 하지 말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치다 보니 어느새 그가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첫 마디부터 인사 얘기가 튀어나왔다. “지난해는 잊어버리고… 올해 좋은 일 있겠지요.” 그러자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만년 부장으로 몇 년 있다가 은퇴의 길을 걷겠지요.”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심초사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편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퇴 준비를 하려니 막막하다고 했다.

서소문 포럼 1/8
실제로 아직 인사를 하지 않은 삼성을 제외한 10대 그룹의 임원 승진자는 전년보다 30%가량 줄었다. 대부분의 그룹에서 임원 승진자가 줄었고 어떤 그룹은 임원 승진자가 전년의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기도 했다. 각 그룹은 조직의 ‘효율화’ ‘슬림화’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전문가는 이를 불황형 감원으로 진단한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 수준으로 게걸음을 하는 데다 대외환경 악화와 각종 규제 등으로 기업인의 경제하려는 의지가 크게 꺾였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 경제 전망도 여전히 안갯속이니 기업이 허리띠 졸라매는 건 당연하다.
임원을 유지하거나 쟁취한 사람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 지난해 말 인사에서 유임된 한 대기업 임원은 “유임 통보를 받기 전까지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며 “곳곳에서 임원이 잘려나가니 회사가 쑥대밭이 됐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임원은 “한 1년차 임원은 인사 전날에 해임 통보를 받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최근 재계 인사의 특징은 젊은 오너의 경영 참여와 30~40대 임원의 약진이다. 주요 기업은 미래 산업에 대응한다며 1960년대생 CEO를 속속 전진 배치하고 70~80년대생 임원을 발탁했다. 이러다 보니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에 태어난 임원은 동료 임원엔 치이고 젊은(?) 상사에게는 밀리는 낀 세대가 됐다. 이들은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최근엔 임원 1~2년차에 물러나는 경우도 많아 이래저래 항상 쫓기고 불안하다. 3~4년 선배인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가 짧게는 3~5년, 길게는 6~8년 임원 자리를 지킨 것을 봤던 그들에겐 세월이 야속하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러들고 있기엔 낀 세대 임원의 역할이 막중하다.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는 크고 작은 결정은 밀알이 돼 나중에 한국 경제를 이끄는 큰 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해서다. 낀 세대 임원이여! 가슴을 활짝 펴자.
김창규 경제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