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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2003년, 씁쓸한 추억

중앙일보 2020.01.08 00:34 종합 29면 지면보기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총장님.”
 
그가 화들짝 놀랐다. 기자도 놀랐다. 그를 실제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 3월의 어느 날 밤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잠복 중이던 기자의 눈에 김각영 검찰총장이 포착됐다. “지금의 검찰 수뇌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돌직구’를 맞고, 총장직에서 물러난 직후였다. 김 총장은 “당분간 지방에 머무를 예정”이라 공표한 뒤 전화기를 껐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택에 머물러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반신반의하면서 기다리기를 몇 시간, 과연 그가 보였다.
 
그는 기자의 습격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일언반구 언급 없이 자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매정하게 쫓겨난 이에게 더 달라붙고 싶지는 않았다.
 
김 총장은 비록 전임 정부에서였지만 정당하게 검찰총장이 된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를 참여정부는 등 떠밀어 내보냈다. 새 정부에는 다 계획이 있었다. 곧이어 고참 고검장 및 검사장들도 초임 보직 발령이라는 수모를 안기는 방식으로 몰아냈다. 일거에 인적 쇄신이 이뤄졌다.
 
하지만 계획에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새 검찰은 ‘노무현의 검찰’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법 대선자금과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를 통해 대통령에게 치명상을 안겼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 굴종의 역사를 고려할 때 “(노 대통령 혐의에 대해)나름대로 결론이 있지만, 국가 안정과 대통령의 면책특권 등을 고려하면…(사법처리는 하지 않겠다)”이라는 안대희 당시 대검 중수부장의 발언 수위는 놀라울 정도였다. 안 중수부장은 “(면책특권이 사라지는)대통령 퇴임 이후에 수사할 수 있다는 뜻이냐”는 후속 질문에 “나는 그때까지 검사 안 할 것 같은데…”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결과적으로 우울한 예언이었다.
 
연일 화제인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앞두고 2003년의 그 인사가 떠오르는 건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인사의 내용과 후과가 그때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일련의 청와대 수사 무마를 위해 파격 인사를 단행할 거라면 순진한 발상이라 전하고 싶다. 윗자리가 바뀐다 해도 검찰에는 여전히 수사권과 좋게 말하면 정의감, 낮춰 말해도 공명심이 넘치는 검사들이 수두룩하다. 윗선에서 수사를 덮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소탐대실의 우려가 큰 무리수는 두지 않는 게 낫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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