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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한국 첫 글로벌 로펌 탄생…원더걸스로 끝날까 BTS 될까

중앙일보 2020.01.07 00:23 종합 26면 지면보기

세계 진출이라는 선구적 도전이냐, 소탐대실로 끝날 탐욕이냐

철저하게 내수용인 국내 로펌의 세계 진출은 가능할까. 국내 첫 글로벌 로펌의 탄생은 절정의 인기를 뒤로하고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를 떠올리게 한다. 미완으로 끝난 원더걸스가 될지, BTS만큼 성공할지 주목된다. 2009년 미 FOX 웬디 윌리엄스 쇼에 출연한 원더걸스 [사진 유튜브 캡처]

철저하게 내수용인 국내 로펌의 세계 진출은 가능할까. 국내 첫 글로벌 로펌의 탄생은 절정의 인기를 뒤로하고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를 떠올리게 한다. 미완으로 끝난 원더걸스가 될지, BTS만큼 성공할지 주목된다. 2009년 미 FOX 웬디 윌리엄스 쇼에 출연한 원더걸스 [사진 유튜브 캡처]

# 때는 소녀시대(SM) 같은 한국 아이돌그룹이 중화권은 물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음악 시장인 일본에서도 막강한 팬덤을 확보하며 돈을 긁어모으던 2009년. 소녀시대와 함께 걸그룹 양대 축으로 꼽히며 사회적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던 원더걸스(JYP)가 돌연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안방에 가만히 앉아 톱스타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버리고 완벽한 신인으로 돌아가 미국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원더걸스의 도전 앞에 기대나 응원보다 우려와 비아냥이 더 많이 쏟아졌다. 주로 “아시아에서 좀 통한다고 팝 음악 본류인 미국 시장을 넘보다니,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냉소적 반응이었다. 여기엔 합리적 문제 제기를 넘어 해보기도 전에 겁부터 먹는 변방 특유의 자기비하와 패배의식도 분명 깔려 있었다. 소녀시대 등 경쟁 걸그룹이 국내와 아시아 시장 수성에 치중한 2009년 원더걸스는 이렇게 스스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정상에서 미국 간 원더걸스처럼
스타 변호사가 “세계 진출” 도전
내수용 법률시장 한계 극복하며
J팝과 차별화한 K팝 길 갈지 관심

# 법무법인 태평양 국제중재팀을 이끌어온 김갑유(58) 변호사는 세계 3대 국제중재기구 모두에서 상임위원으로 선임(2009)됐고, 아시아인 최초로 유엔 산하 세계상사중재위원회(ICCA) 사무총장으로 선출(2010)된 한국 국제중재업계의 슈퍼스타 중 한사람이다. 4조원대 현대오일뱅크 사건을 승소로 이끌어 영국의 권위 있는 국제중재전문지 GAR(Global Arbitration Review)의 올해의 중재상(2010)을 받기도 했다. 미국·유럽의 대형 국제로펌 놀이터인 국제중재 시장에서 김앤장과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며 국내에서만큼은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다. 지금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편안히 대접받는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철저하게 내수용인 국내 로펌의 세계 진출은 가능할까. 국내 첫 글로벌 로펌의 탄생은 절정의 인기를 뒤로하고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를 떠올리게 한다. 미완으로 끝난 원더걸스가 될지, BTS만큼 성공할지 주목된다. 새해 전날 미 타임스퀘어 공연 무대에 선 BTS. [뉴욕=AP 연합뉴스]

철저하게 내수용인 국내 로펌의 세계 진출은 가능할까. 국내 첫 글로벌 로펌의 탄생은 절정의 인기를 뒤로하고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를 떠올리게 한다. 미완으로 끝난 원더걸스가 될지, BTS만큼 성공할지 주목된다. 새해 전날 미 타임스퀘어 공연 무대에 선 BTS. [뉴욕=AP 연합뉴스]

그런데 2019년 9월 세계변호사협회(IBA) 서울총회 개막을 하루 앞두고 느닷없이 “세계 진출”을 선언하며 독립했다. 커리어의 정점에서 더 큰 시장으로 뛰어든 원더걸스처럼 김 변호사도 안락한 국내 대형 로펌을 스스로 나와 스위스의 유명 중재인 볼프강 피터 변호사와 함께 서울·제네바·베른·싱가포르·시드니에 사무소를 둔 국제중재 전문 글로벌 로펌 피터&김을 만든 것이다. 한국 로펌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무모한 도전에 법조계에선 박수보다 “왜”라는 의문이 먼저 나왔다.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한국 변호사가 주도하는 로펌이 초대형 영미권 로펌과 직접 경쟁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이냐”는, 원더걸스가 이미 10년 전에 받았던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평양·김앤장 할 것 없이 한국 로펌은 론스타의 ISD(국가-투자자 소송) 등 한국이 당사자인 굵직한 국제중재사건에서도 영미권 대형 로펌의 보조적 역할만 해왔던 게 사실이다. 한국 로펌이 외국 고객을 두기는커녕 한국 내에서조차 한국 로펌에 보조 역할만 기대하는 실정이다.
 
한 국제중재 변호사는 “글로벌 톱 로펌을 쓰는 건 실력 격차 외에도 명성 때문인데 브랜드파워와 맨파워가 모두 부족한 신생 로펌에 일을 줄 고객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과연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국제중재 변호사도 “말은 글로벌을 지향한다지만 실은 오래 몸담았던 태평양에 타격을 주는 소탐대실 선택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 첫 글로벌 로펌인 피터&김의 볼프강 피터(왼쪽)와 김갑유 변호사. [사진 김갑유]

한국 첫 글로벌 로펌인 피터&김의 볼프강 피터(왼쪽)와 김갑유 변호사. [사진 김갑유]

이쯤 되면 누구라도 김 변호사의 선택을 두고 “왜”라는 질문과 함께 “세계 진출이 과연 실현 가능한 목표인지” 묻고 싶어진다. 오는 9일 공식 출범을 앞둔 피터&김이 자리 잡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무역센터) 17층 사무실을 찾은 이유다. 웬만한 신생 로펌에 비해 위치나 인테리어는 훨씬 화려했다. 하지만 태평양이나 김앤장처럼 방문객을 압도하는 리셉션 공간 따로 없이 집무실과 회의실만 갖춘 실용적 공간은 김 변호사 설명대로 “스타트업”이라 부를만했다.
 
김 변호사가 스타트업(피터&김)을 차린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이 잘 하고 있고 더 잘 할 수 있는데 내수용에 안주하면 미래는 없다는 것, 좀더 비관적으로 표현하면 결국 국내 시장도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중재는 국가별 칸막이가 없어 어느 나라 고객 업무라도 수행할 수 있는 완전 자유경쟁 시장이라 아무 변호사나 뛰어들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전 세계 유수의 로펌들이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다. 한국 변호사가 한국 안에서 유능한 것도 의미 있지만 글로벌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면 향후 한국 변호사의 해외 진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글로벌 역량을 키우는 게 한국시장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 K팝이 팝 심장부인 미국에서 한국어로 노래하는 BTS(방탄소년단)라는 세계적 현상을 만들어내는 동안 한때 한국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J팝이 철저히 내수용에 머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걸그룹 경제학』이 2010년대 전후 한국과 일본의 대표 걸그룹 소녀시대와 AKB48을 비교한 분석을 보면 자국 음반 판매량은 AKB48의 압승이다. 그러나 유튜브 조회 수나 구글 트렌드 등 글로벌 관점에선 소녀시대가 압도적 우위다. 콘서트 투어 결과도 마찬가지다. 한국 밖을 내다봤던 소녀시대는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이후 미국 시장까지 넘봤지만 일본 시장만 겨냥한 AKB48은 훨씬 작은 시장인 한국에서도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몇 년 후 한국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서야 겨우 얼굴을 알렸다.
 
지금은 국제중재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중국을 압도한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안방에 앉아 보조적 역할에 만족하면 비단 영미권 대형 로펌뿐 아니라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무섭게 성장하는 싱가포르 로펌에도 잠식당하지 말란 법이 없다. J팝처럼 말이다.
 
문제는 과연 세계에 통할 경쟁할 경쟁력을 갖췄느냐는 점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원더걸스로 다시 돌아가 보자. 잘 알려진 대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원더걸스는 2009년 미국 진출 첫해엔 빌보드 핫100의 76위에 오르는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두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미국 진출은 대실패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 계속 활동했더라면 인기는 물론 돈도 상당히 벌었겠지만 바닥부터 훑는 고생을 하고도. 미국에서 벌어들인 전체 음원 수입이 500만원에 불과하다는 보도가 나올 만큼 참패했다. 게다가 미국 진출로 한국시장을 비운 사이 경쟁자 소녀시대가 확실한 원톱으로 자리를 굳히는 동시에 2012년 미국 메이저 음반사(인터스코프 레코드)와 계약해 미국에 무혈입성하자 “섣부른 미국 진출이 독이 됐다”는 조롱까지 견뎌야 했다.
 
원더걸스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헛짓을 한 것일까. 그러나 BTS를 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인 미국 팝 칼럼니스트 제프 벤저민의 평가는 다르다. 그는 “원더걸스는 미국 시장의 개척자”라며 “빌보드가 처음 K팝을 주목하게 된 것도 원더걸스 덕분”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실제로 당시 원더걸스의 빌보드 라이브 퍼포먼스는 아델보다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원더걸스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K팝은 원더걸스의 선구적 노력의 혜택을 받았다. 소녀시대의 미국 진출, 싸이의 인기, 더 크겐 BTS의 유례없는 성공 역시 원더걸스가 뿌린 씨앗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김 변호사도 이런 역할을 자처한다. 그는 “차라리 ‘해봤는데 실패했다’가 낫지, 해보지도 않고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말은 이렇게 해도 성공에 대한 욕심을 슬쩍슬쩍 내비쳤다. 그가 모델로 삼은 게 쓰리 크라운스(Three Crowns)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전 세계를 주무르는 초대형 글로벌 로펌 프레시필즈 중재팀을 이끌던 ICCA 회장 출신 얀 폴슨이 2014년 독립해 6명으로 시작한 국제중재 전문 부티크 로펌 쓰리 크라운스는 불과 설립 4년만에 GAR이 선정한 톱 10 로펌에 들었다. 브랜드 파워가 없더라도 경쟁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김 변호사는 “쓰리 크라운스같은 중재업계의 BTS가 되면 금상첨화겠지만 설령 원더걸스로 끝난다 해도 후배들에게 한국 말고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만 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어떤 변호사 말대로 지금 한국 국제중재업계가 “성패를 떠나 김 변호사의 선택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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