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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뽀뽀는 언제?" 딸이 내게 건넨 23가지 질문

중앙일보 2020.01.05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8)

2020 경자년 새날이 밝았다. 내 책상에 새로운 달력이 자리 잡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늘 그렇듯 지난해 달려왔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지난 달력을 본다. 날짜마다 무수히 적혀있는 메모들이 지난 일 년간 걸어온 내 발자취를 증언하고 있다. 만감이 교차한다.
 
나에겐 딸이 하나 있다. 작년 봄에 간호대학교 졸업하고 근처 대학병원에 출근하고 있다. 벌써 취직한 지 1년이 다가온다. 잘 자라주어 늘 고맙고 기특한 딸이다. 얼마 전 딸아이가 회색빛 노트 한 권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이다음에 엄마가 늙으시고 영영 내 곁에 안 계실 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 때, 그럴 때마다 곁에 놓고 읽어보려고요.’
 
겉면에 쓰인 문구를 보니 ‘부모님 탐구 영역’이라고 적혀있었다. 누런빛을 띠는 속지에 수십 가지 질문이 있다. 딸은 내게 스물세 개의 사소하고 다양한 것들을 물어왔다. 대부분은 엄마인 나와 딸 사이에 서로 바라는 점이나 앞으로 알아두면 좋을 질문들이었다.
 
얼마 전 딸아이가 '부모님 탐구 영역'이라 적힌 노트를 내밀었다. 딸은 내게 스물세 개의 사소하고 다양한 것들을 물어왔다. 엄마인 나와 딸 사이에 서로 바라는 점이나 앞으로 알아두면 좋을 질문들이었다. [사진 pexels]

얼마 전 딸아이가 '부모님 탐구 영역'이라 적힌 노트를 내밀었다. 딸은 내게 스물세 개의 사소하고 다양한 것들을 물어왔다. 엄마인 나와 딸 사이에 서로 바라는 점이나 앞으로 알아두면 좋을 질문들이었다. [사진 pexels]

 
하나하나 답을 쓰면서 문득 돌아보니, 내 속으로 낳고 길러 이젠 성인이 된 딸과 나 사이에 그간 대화가 생각보다 부족했음이 보였다. 어느 집 모녀 못지않게 살가운 우리 사이임에도 내가 해 주지 못한 말들이 참 많았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일상적 대화 외에 깊은 대화가 턱없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내게 한 대표적 질문들을 보면 이렇다.
*첫 연애와 첫 뽀뽀는 언제?
*엄마가 어린 시절 20대가 된다면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은?
*엄마의 어린 시절 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할머니 할아버지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 있나요? 어떤 잠버릇이 있나요?
*할머니 할아버지께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건 언제인가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나요?
*부모님이 저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성장하는 저를 보며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저를 키우며 자부심을 느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부모님에게 저는 어떤 존재인가요?
*저에게 미안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저에게 받고 싶은 용돈은 얼마인가요?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으신가요?
*다시 태어나도 저의 부모님, 해 주실 건가요?
 
대략 이런 질문들이었다. 답을 쓰는 내내 웃음이 나기도 했고, 때로는 한참 생각을 정리해 답을 적어야 할 내용도 있었다. 그 마지막에는 이런 질문이 또 있었다.
 
*이 외에 글로 다 적지 못한 이야기를 적어 주세요.
이 질문에 나는, 잠시 차 한잔을 마신 후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인생은 사막을 횡단하는 자동차 경주 같아. 연료만 넉넉하다면 거친 바람도 황량한 들판도 즐기면서 달려갈 수 있지. 그런데 연료가 떨어지면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도 장애물로 보이게 되지" [사진 pexels]

"인생은 사막을 횡단하는 자동차 경주 같아. 연료만 넉넉하다면 거친 바람도 황량한 들판도 즐기면서 달려갈 수 있지. 그런데 연료가 떨어지면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도 장애물로 보이게 되지" [사진 pexels]

 
"딸아,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늘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 있었어.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큰 복은 하늘이 주고 작은 복은 그 사람 손에 달려있다'는 말이란다. 큰 부자는 하늘이 줘야 가능하고, 작은 부자는 그가 아껴 쓰고 준비해야 만들어진다는 거야. 엄마가 지금껏 살아 보니 이 말이 맞는 것 같아. 항상 아껴 쓰고 대비하면 최소한의 꿈은 이루며 살게 되더구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고, 그다음은 경제적인 능력이야. ‘인생은 사막을 횡단하는 자동차 경주 같아.’ 그 차가 사막 한가운데 있어도 연료만 넉넉하다면 거친 바람도 황량한 들판도 즐기면서 달려갈 수 있지. 그런데 사막에서 연료가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들도 장애물로 보이게 되지…. 그 연료가 돈이야. 엄마가 살아 보니, 사막에서 연료가 떨어진 차는 다급하게 다른 선택을 하게 되더구나. 그런데 그 대부분의 선택이 쫓기듯 내리는 순간의 결정이라서 항상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더구나. 그것들을 해결하려 애쓰는 동안 차는 점점 더 모래사막으로 빠지고 말지. 엄마는 인생 모래사막에 내 차가 빠져 그곳을 헤쳐나오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고 무척 힘들었다. 네가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혹시 모를 사막의 변수를 대비하려면, 항상 연료가 넉넉해야 한다. 그래야 쫓기지 않고 차분히 변수에 대처할 수 있단다. 그 연료가 충분하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섣부른 판단이나 실수를 피해갈 확률이 높단다. 딸아, 돈은 쓰고 남은 것을 저축하는 게 아니란다. 적은 액수라도 언제나 저축 먼저 하고 남은 것을 쓰는 거야. 우리 딸은 그런 일을 대비해서 지금의 청년 시절부터 차근차근 인생의 연료를 준비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질문에 내 의견을 다 적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뒷장에 이런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My heroes are and were my parents.

I can’t see having anyone else as my heroes.
나의 영웅은 부모님이었고 부모님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영웅으로 생각해 볼 수도 없다! -Michael Jordan-”
 
나는 이 문구를 읽으며 생각했다. 돌아보면 내게는 자식이 스승이었다. 나는 자식을 낳고 기르는 동안 진정한 어른이 되었고 가장 많이 성숙했다. 질문에 답을 적은 그 노트를 딸의 방 화장대 위에 갖다 놓고 조용히 나왔다.
 
2020 경자년 새해, 첫출발하는 이 땅의 모든 청년에게 축복이 가득 넘치길 빈다. 2020 경자년 새해, 세상 모든 부모, 당신은 진정한 영웅이라고 외쳐본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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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김명희 시인·소설가 필진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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