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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유혁, 소년에서 청년으로··· “연기자 꿈 꿀래요”

중앙일보 2020.01.04 11:00
조금 특별한 사연을 가진 소년이 있다. 그는 어리광 대신 아홉살 때부터 가장의 역할을 짊어져야만 했다. 배고픔이 악착같이 소년을 따라다녔다. 생활고에 지친 열네 살 소년은 나고 자란 북의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한 달만에 도착한 한국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와 동시에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책임도 주어졌다. 7년 전 배고픔에 고향을 떠났던 소년은 첫사랑에 아파하고 꿈을 위해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의 유혁(19)은 지난 2013년 탈북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초콜릿 몇 개로 연명하며 이름 모를 산을 넘었고 널빤지만 한 작은 배로 강을 건너는 험난한 길이었다. 탈북의 길은 끝을 가늠할 수 없었고 강제북송의 두려움이 계속 그를 추적했다. 그의 유순한 얼굴 뒤에는 험난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2000년생 즈믄둥이인 유혁은 이곳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이했다.  
유혁은 지난 2013년 탈북해 한국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았다. 홀로서기를 통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했고 다가오는 3월에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 예정이다. 유혁이 오랫동안 생활한 여명학교 교실에 누웠다. 칠판에 적힌 글자는 그가 직접 썼다. 장진영 기자

유혁은 지난 2013년 탈북해 한국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았다. 홀로서기를 통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했고 다가오는 3월에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 예정이다. 유혁이 오랫동안 생활한 여명학교 교실에 누웠다. 칠판에 적힌 글자는 그가 직접 썼다. 장진영 기자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거지처럼 살았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 이혼하셔서 따뜻한 엄마의 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연로하신 할머니와 항상 술에 빠진 아빠와 함께 살았다. 너무 배고팠다. 물만 마시며 8일을 버틴 적도 있었다. 집안에 일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절벽에서 버섯을 캐서 팔기도 했고 군인들 심부름을 하며 먹을 것을 구했다. 왜소한 몸으로 너무 힘들었다. 가장 역할이었다. 돈 벌어서 고기 사 먹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탈북을 결심한 계기는
먼저 탈북한 엄마와 이모를 통해 연락이 왔다. 그때까지는 다른 나라가 있다는 걸 몰랐다. 할머니와 아빠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상황상 나만 갈 수 있었다.  
 
탈북 경로는
두만강을 건넜고 중국,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갔다. 기차로, 버스로 하염없이 달렸다. 몇 개의 산을 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주먹밥과 초콜릿 같은 걸 먹으면서 버텼다. 엉덩이 하나 겨우 앉을 수 있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그 아래 악어가 가득하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하더라.  
 
두렵지 않았나
두만강 건널 때 단도를 지니고 갔다. 잡히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북송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북송되면 가족들한테 더 위험할 거 같아 두려웠다. 한국에 가면 그만한 고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한국은 왠지 좋을 것 같았다.  
유혁군이 이흥훈 여명학교 교장(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혁군은 "진심으로 부모님처럼 대해주는 선생님들 덕에 마음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유혁군이 이흥훈 여명학교 교장(오른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혁군은 "진심으로 부모님처럼 대해주는 선생님들 덕에 마음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한국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북한만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었는데 우물 안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정착하는 게 쉬웠나
하나원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쳤다. 솔직히 공부는 어려웠다. 이후 기숙학교인 한겨레학교에 다녔다. 먼저 탈북한 이모를 따라 미국에서 1년 정도 생활하기도 했다. 적응이 쉽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또 다른 북한 이탈 청소년 학교인 여명학교를 다녔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생활하면서 어려움을 느낀 점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친구 몇몇과 같이했는데 사장님이 우리에게만 힘든 일을 시키더라. ‘북한 애들은 힘들어도 된다’고 하면서.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했다.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서. 나중엔 ‘혁이 일하는 거 보고 배워’라고 하더라. 지금도 그곳에서 일한다. 사장님도 바뀌었고 불판을 닦는 대신 고기를 손질한다. 돈도 더 많이 번다. 일하지 않을 때도 밥 먹으러 가고 식구처럼 지낸다. 사는 데 어려움은 크게 없다. 다만 언어에서 지금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신조어, 외래어도 많고. 북한에선 낙지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오징어라고 하더라. 대신 신기하고 좋은 게 많았다. PC방, 영화관, 노래방도 좋고. 북한에서는 전력이 부족해 해가 떨어지면 자야 했다. 여기서는 도시가 밤새 반짝반짝하는 게 신기했다. 요금 한 번 내고 계속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것도 좋다.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3일 서울 중구 한양교회에서 여명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유혁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수여받고 있다. 이날 총 47명이 졸업했다. [사진 여명학교]

3일 서울 중구 한양교회에서 여명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유혁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수여받고 있다. 이날 총 47명이 졸업했다. [사진 여명학교]

 
학교생활은 어땠나
마음속에 답답함이 많았다.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많이 싸웠다. 생각해 보니 아픔이었던 거 같다. 선생님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보살펴 주셨다. 네가 변해야 주변에 사람들이 남아있을 거라고 말해줬다. 진심이 느껴졌다. 부모님께 받지 못했던 관심을 받으니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나쁜 생각을 하다가도 선생님들 떠올리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마음속에 어지러운 감정들을 랩 가사를 쓰면서 많이 편해졌다.
유혁은 힙합을 즐겨 듣고 랩 가사 쓰는걸 통해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래 동영상은 그가 직접 가사를 쓰고 공연하는 모습이다. 노래 제목은 '고민'이다. [사진 유혁]

유혁은 힙합을 즐겨 듣고 랩 가사 쓰는걸 통해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래 동영상은 그가 직접 가사를 쓰고 공연하는 모습이다. 노래 제목은 '고민'이다. [사진 유혁]

 
랩 가사를 쓴다고
한국에 왔을 때 힙합 음악을 많이 들었다. 거친 멜로디인데 가사가 왠지 내 마음 같았다. 마음을 옮겨적다 보니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실연한 마음도 써보고, 좋은 말도 써봤다. 전에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랩 가사를 쓰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게 됐다.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말투에 아직 북한 억양이 많이 남아있다
솔직히 금세 통일이 될 줄 알았다. 통일되어 가족들 만났을 때 내가 변해있으면 어색해할까 봐 일부러 고치지 않은 것도 있다.  
 
북한에 그리운 것이 있는지
내 고향 경성에 가면 밥 완자, 두부밥, 꿀약과, 순대 등을 파는 먹거리 시장이 있다. 그 맛이 그립다. 특히 순대는 썰지 않고 통째로 들고 먹는데 너무 맛있다. 서울에서 파는 이북식 순대도 먹어봤는데 그 맛이 아니더라. 통일되면 꼭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가보고 싶다.  
홀로 탈북해 이곳에 정착해야했던 유혁은 셀카 찍기와 친구들과 수다떠는걸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사진 유혁]

홀로 탈북해 이곳에 정착해야했던 유혁은 셀카 찍기와 친구들과 수다떠는걸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사진 유혁]

유혁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들에는 상장, 선물받은 책, 연기 대본 등이 있다. 장진영 기자

유혁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들에는 상장, 선물받은 책, 연기 대본 등이 있다. 장진영 기자

 
유순한 얼굴 뒤에 상남자가 있는 것 같다
변해야겠다 생각했고 많이 웃으며 노력했다. 예전엔 가족들에 대해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거칠게 살았던 거고 지금은 자유롭고, 편안하고 좋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진로는 정했는지
서울예대 공연학부 연기전공에 진학 예정이다. 연기자가 되고 싶다. 사실 TV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북한에서도 한국 방송을 많이 본다. 유명해지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도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다. 연극영화과 진학을 준비하면서 여러 무대에 서봤다. 내 연기를 보고 사람들이 웃고 박수쳐 줄 때 쾌감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냥 유명한 사람 말고 관객들을 웃게 하고 울리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다.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내가 좋아하는 연기와 랩을 할 때다. 사람들이 그 모습 보고 웃을 때 행복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행복인 거 같다.  
 
이곳에서 일곱 번째 새해를 맞이했다. 스스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이겨내고 여기까지 온 것에 너무 감사하고. 앞으로도 힘든 일이 있겠지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항상 날 믿어 고마워’라고 말해주고 싶다.
유혁은 주민등록증 발급 받았을때 "어른이 되었다기 보다는 이곳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유혁은 주민등록증 발급 받았을때 "어른이 되었다기 보다는 이곳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청년 유혁의 꿈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행복하게 즐기면서 살다가 평생을 같이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  
 
사진·글·동영상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동영상제공 유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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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하는 인터뷰'의 줄임말로, 인물과 그가 소유한 장비 등을 함께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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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장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