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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판 미완의 역사 청산, 동독 슈타지 비밀 문서 대량 파기

중앙선데이 2020.01.04 00:20 668호 26면 지면보기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4〉

1990년 1월 베를린-리히텐베르크에 있는 슈타지 본부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슈타지를 생산현장으로 보내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1990년 1월 베를린-리히텐베르크에 있는 슈타지 본부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슈타지를 생산현장으로 보내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보기관은 통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흔히 ‘슈타지(Stasi·국가보위부)’라 칭했던 동독의 정보기관은 당시 동독 인구에 비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큰 정보 조직이었을 것이다. 정규 요원들의 숫자만 9만 명이 넘었으며 거기에다 20만 명에 달하는 비공식 정보원들이 함께 동독의 모든 주민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
 

반체제 인사 불법 감시·탄압 악명
서독서도 3만여 명 스파이 활동

증거 없어져 처벌 면한 가해자들
통일 후 높은 연금 받아 호의호식

취업까지 금지당했던 피해자들
물질적·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려

이러한 배경으로 본다면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9년 10월에 거리로 뛰쳐나와 동독의 개혁을 외쳤던 시위대가 슈타지 해체를 요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슈타지를 생산현장으로 보내라!’는 당시 시위대가 가장 많이 외치던 구호 중 하나였다. 시위대가 서독이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독에 만연해 있던 감시의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의지가 동독 평화 혁명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브란트 총리 최측근 비서로 스파이 침투
 
슈타지 문서들. 89년과 90년 사이에 자행된 대규모 문서 파기에도 불구하고 현재 4100만 개의 분류 카드와 111km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서류가 존재한다. [사진 독일연방문서청]

슈타지 문서들. 89년과 90년 사이에 자행된 대규모 문서 파기에도 불구하고 현재 4100만 개의 분류 카드와 111km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서류가 존재한다. [사진 독일연방문서청]

슈타지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길다. 1945년 소련군에 권력이 이양된 직후 소련 정보기관은 여러 군데에 감옥을 설치하는데, 그중 상당수가 나치가 사용하던 감옥이었다. 소련군은 이곳에 나치주의자들과 공산주의의 적들인 지주, 중도 우파 인사들, 기독교인, 지식인 등을 감금하고 그들을 고문했다.
 
50년부터 점차 이러한 임무는 슈타지가 맡게 되었다. 동독 시절의 초기에는 베를린 전철 노선이 모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철을 타고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전철을 이용해서 공화국(동독)을 탈출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53년 6월 17일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열악한 근로 조건에 항거해 시위하고 나중에는 통일을 요구했던  민중봉기는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서 무력으로 진압했다. 동독 정권은 민중봉기에 가담한 6000명 이상의 시민을 체포했다. 이 중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고 또 많은 이들이 긴 시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운 이후에 중점을 두었던 사안들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과 간첩행위 그리고 공화국 탈출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 핵심 내용은  정권에 반대하는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인사들에 대한 정신적인 억압이었다.
 
동시에 슈타지는 동독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도 활발하게 공작을 수행했다. 약 3만 명에 이르는 ‘비공식 정보원들’이 서독에서 활동했다. 이들의 직업 또한 다양해서, 언론인이나 정치인 또는 군사 분야 또는 학술 분야에서의 기밀을 다루는 사람들도 있었다. 슈타지는 심지어 빌리 브란트 서독 연방 총리의 최측근인 개인 비서 자리에 귄터 기욤이라는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공작에 성공했다. 기욤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 브란트 총리는 사임했다. 슈타지는 70년대에 서독에서 악명을 떨쳤던 테러리스트 그룹인 적군파와의 협력도 서슴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과의 협력이나 심지어는 서독의 극우파 테러리스트들과의 협력에도 적극적이었다.
 
베를린 호엔쉔하우젠 슈타지 감옥. 이곳에서는 물리적인 고문과 정신적인 억압행위가 자행됐다. [사진 독일연방문서청]

베를린 호엔쉔하우젠 슈타지 감옥. 이곳에서는 물리적인 고문과 정신적인 억압행위가 자행됐다. [사진 독일연방문서청]

에리히 밀케는 동독 국가수반이었던 에리히 호네커와 오랫동안 슈타지 장관으로 재직하며 슈타지를 강력하게 장악했던 인물이다. 그가 사임한 이후 매우 다급한 상황에서 그 이름을 ‘국가 안보청’으로 바꾸면서 새로운 형태의 국가기구로 유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동시에 슈타지가 자행한 불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문서를 대규모로 파기하려는 시도 또한 있었다. 그러자 매주 동독 사회의 개혁을 요구해 왔던 시위대는 89년 12월부터 동독 행정관구의 슈타지 지역본부들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90년 1월 15일 동독 지도부와 반정권 세력 간의 협의체였던 중앙원탁회의는 슈타지의 해체를 요구했으며 같은 날 밤 베를린-리히텐베르크에 위치한 슈타지 본부에 시민들이 난입해 시민 대표들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슈타지 본부를 접수했다. 하지만 문서 파기는 지속됐으며 90년 2월에는 원탁회의가 그것을 승인하는 일까지 있었다. 90년 3월 최고인민회의 선거에서 공산 진영이 권력을 잃으면서 문서 파기 행위는 완전히 중단됐다. 스파이 활동과 관련된 민감한 일부 인사 관련 문서들이 미국 중앙정보부(CIA)로 유출된 경우가 있었다.
 
이는 통일 이후에 유력한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통일 이후 오랫동안 민사당 총재를 지낸 그레고르 기지였다. 슈타지의 해당 문서 파기로 인해 슈타지의 관련 활동을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동독의 슈타지는 당을 위한 ‘칼과 방패’였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동독의 슈타지는 당을 위한 ‘칼과 방패’였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이는 서독에서 활동했던 비공식 정보원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슈타지가 자행했던 불법행위의 청산을 보장하기 위해 ‘독일 연방 구동독 슈타지 문서 보관소 담당관’직이 신설됐으며 그 자리에는 주로 동독 시절 반정권 활동을 했던 명망 있는 인사가 임명됐다. 요아힘 가우크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후에 독일 연방 대통령(2012~2017)을 역임했다.
 
슈타지 문서 처리 문제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통일 이후 현 독일 연방의회 의장인 볼프강 쇼이블레와 같은 일부 정치인들은 동서독 지역 간 및 동독 지역 자체 내의 화합을 위해 슈타지 문서를 완전히 폐기할 것을 권고했다. 동독 슈타지의 억압과 감시 메커니즘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 간에 또는 부부간에 서로 감시한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통일 한반도 북 보위부 문서 개방된다면 …
 
에리히 밀케는 1946년부터 슈타지가 동독 전역에서 감시 및 억압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57년부터 89년까지 슈타지 장관을 지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에리히 밀케는 1946년부터 슈타지가 동독 전역에서 감시 및 억압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57년부터 89년까지 슈타지 장관을 지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그러나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체적인 규명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따라 슈타지 문서는 열람이 가능해졌지만 피해자들은 실제로는 크게 실망했다. 충분치 않은 문서들로 인해 사법적인 처리가 어려운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유명한 시민 운동가인 배르벨 볼라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정의였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것은 법치국가였다.” 많은 슈타지 희생자들은 정신적인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적은 연금과 같은 물질적인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동독 시절 정치적인 불이익의 하나로 직업을 가지는 것을 금지시킨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전 슈타지 요원들은 예전에 받았던 높은 임금을 근거로 상대적으로 높은 연금을 수령하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예전 동독 슈타지 시절에 소련에 처음으로 정보기관을 창설했던 펠릭스 치르친스키의 이름을 따서 만든 펠릭스 치르친스키 경호대 소속이었던 자들을 주축으로 새로 만든 경호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슈타지와 관련하여 정치적인 논의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화도 제작됐다. 그중에서 2006년 최우수 영화상을 받은  ‘타인의 삶’은 슈타지를 주제로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북한 보위부 문서가 개방되는 것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한때 북한과 협조했다는 비난은 정적을 공격하는 단골 메뉴였다. 또한 남측에서도 북한 보위부를 위해 활동하는 스파이들이 많을 것이다.
 
과연 한국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화합에 치중할 것인가? 아니면 청산에 방점을 둘 것인가? 정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독일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아일랜드·캄보디아 그리고 어려운 과거 역사의 청산과 관련된 한국의 사례에서도 보아 왔다. 물론 현재 우리는 북한 보위부의 서류 개방 여부 자체도 모르는 시점이지 않은가? 〈계속〉
 
※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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