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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아무리 퍼먹어도 자발성 없으면 말짱 헛공부

중앙선데이 2020.01.04 00:20 668호 27면 지면보기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수동적 공부는 그만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반복해서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 학생들과 크게 다른가요?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아직 막연한 인상에 불과하지만,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선생들은 요즘 학생들이 점점 수동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어진 과제를 해내고 학점을 챙긴 뒤 빨리 다음 단계로 가고 싶다는 조바심이랄까. 최대한 수동적으로 있다가 학점만 따고 떠나면 족하다는 느낌이랄까.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듣고 가겠다는 심산이랄까. 이런 느낌은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취업이 날로 어려워지는 엄혹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태도가 만연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신을 피해자나 약자로 자리매김하는 한 능동적인 태도를 갖기는 쉽지 않다. 
 

공부도 맥주 마시는 것처럼 쾌락
고된 훈련 거치면 즐길 수 있어
쉽지 않은 배움은 결기도 필요

선생은 지식 전달자 그쳐선 안 돼
감성 갖춰 영감 주는 역할도 해야
강의에도 미슐랭 가이드 생길지…

선생도 소극적으로 가르치지 말아야
 
이러한 느낌 자체가 오해인지도 모른다. 수동적인 학생들은 대개 앞에 앉기를 꺼리고 강의자로부터 한껏 떨어져 않으려 드는데, 이런 현상은 선생들에게서도 발견된다. 학생 시절로부터의 습관인지, 평교수들은 회의할 때 대개 학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않는다. 외부 강연의 청중들도 마찬가지다. 팬클럽 회동이 아닌 담에야 앞에서부터 앉는 경우는 드물다. 어느 관청 공무원 연수에 강의를 하러 갔을 때 일이다. 어찌 된 일인지 연수자들이 앞줄부터 차곡차곡 앉는 것이 아닌가. 어째 앞에서부터 앉으시네요? 지정석 제도라서요. 정해진 자리에 앉지 않으면 연수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아요. 어쩐지.
 
수동적인 청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극도의 외로움이 강의자에게 엄습하곤 한다. 제발 반응을 보여줘, 흑흑. 반응을 보여주지 않으면 나도 비뚤어지고 말 테야, 수동적이 되어 버리고 말 테야.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등록금을 냈으니 수동적으로 있다가 학점이나 따서 나가면 그만이다는 자세를 일부 학생이 보인다고 해서 선생도 따라 할 수는 없다. 어차피 월급을 받게 되어 있으니 수동적으로 가르치다가 월급이나 받으면 그만이다는 자세로 선생이 가르치다 보면, 학교가 망하는 건 순식간이다.
 
소극적인 혹은 수동적인 자세는 어쩌면 사려 깊은 태도의 한 측면일 수도 있다. 잘 익지 않은 주장을 섣불리 공개적으로 개진하기보다는 차분하게 남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태도의 일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부에는 두뇌와 체력에 못지않게 배우고자 하는 적극성 혹은 자발성이 중요하다. 똑같이 노력했어도, 자발적인 자세로 공부에 임한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 간 차이는 실로 크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일을 몸에 익히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의견을 잘 표현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먹어도 살이 잘 안 찌는 체질 같은 건 없는지 몰라도, 공부해도 지식이 잘 안 찌는 체질은 있다. 자발성이 장착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지식을 퍼먹어도 머리에 많은 것이 남지 않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자발성이 있는 사람, 스스로 동기부여를 잘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도 거뜬히 해내곤 한다. 자발적으로 원하기만 한다면야, 백두대간을 행군하는 것이 문제이랴, 번거로운 나물 무치기가 대수이랴. 강요받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히말라야산맥 등정이나 백일기도도 적절한 동기만 있으면 거침없이 해낼 수 있다. 반면, 강요받으면 하고 싶은 일도 하기 싫어지는 법. 똑같은 무게라도 억지로 드는 겨울날 아침 아령보다 목말라 드는 여름밤 맥주잔이 가볍게 느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알고 보면, 공부 역시 맥주 마시는 일 못지않게 쾌락적인 일이다.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면 공부하는 순간순간이 쾌락이니, 적극적이 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특히 목적 없는 배움이야말로 즐거운 법. 특정 목적이나 효용에 대한 수단의 성격을 띠는 공부들, 학점을 따기 위한 공부, 자격증을 얻기 위한 공부, 돈을 벌기 위한 공부는 대개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취업을 목적으로 한 전문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일반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러한 무목적적 공부가 주는 즐거움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 대학원에 왔다는 학생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런데 심오한 공부일수록 쾌감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고된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 훈련을 마치기 전에 공부를 포기하면, 공부가 주는 쾌락을 충분히 누릴 수 없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는, 경기 중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출발 직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강하게 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단 공부가 궤도에 오르면 그럭저럭 진행하게 되는 법. 그렇다면 공부하는 과정보다 어려운 것이 고된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는 일이다. 쉽지 않은 공부는 늘 결기를 요구한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기 어려우면, 동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독서 습관이 생기지 않는다면, 독서 모임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공부를 두고 내기를 하는 것은 어떤가. 책을 안 읽어오면 벌금을 내게 하는 것은 어떤가. 그 벌금을 모아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에게 선물을 사서 드리기로 하면 어떤가. 선물하기 싫은 마음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공부하려 스스로 마음먹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학생이 그런 마음을 먹게끔 선생이 북돋는 것은 어떤가? 그 방법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칭찬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고래가 아니지만 그래도 칭찬받으면 신이 나는 법, 신이 난 나머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칭찬은 비판과 함께해야 효과가 있다. 칭찬을 남발하다 보면, 칭찬의 의미 자체가 실종된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사람이 추천하는 무수한 맛집을 신뢰할 수 없듯이 칭찬을 남발하는 선생의 평가는 신뢰할 수 없다.  
  
칭찬은 비판과 함께해야 더 효과적
 
정말 칭찬을 칭찬답게 하려면, 평소에 충분히 비판적이어야 한다. 하버드대학에서 정치사상사를 가르치는 하비 맨스필드 교수는 학점 인플레가 너무 심하다며 수강생들에게 공식 학점과 비공식 학점들 동시에 부여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A 학점은 학점 인플레 때문에 할 수 없이 주는 학점이고, 이 B 학점이야말로 자네가 받아야 하는 진정한 학점일세!
 
너무 오래 학위 과정에 남아 있는 학생이 있길래, 학위 논문을 끝내기만 한다면, 교정에 플래카드를 붙여주겠다고 내가 격려한 적도 있다. “장하다! 김00! 마침내 졸업하는구나! -후련해하는 지도교수” 이렇게 붉은 글씨로 써서 학교 정문과 교정 곳곳에 걸어두면, 졸업식에 참석하는 부모님과 그 학생은 얼마나 가슴 뿌듯하겠는가. 얼마나 감동하겠는가. 너무 감동한 나머지 학교를 영원히 떠나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졸업식 시즌에 하필 해외 출장을 가게 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이 야심 찬 플래카드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오늘날 선생은 (지루한) 지식 전달자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고무하고 영감을 주는 (inspiring) 역할까지 해야 한다. 이는 쉽지 않다. 상대를 고무하고 영감을 주기 위해서는 지식이 많아야 할 뿐 아니라, 감성과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고…어쩌면 외모까지 단정하게 관리해야 할지 모른다. 선생의 외모가 깔끔해야 학생들이 잘 배운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강사가 잘생기면, 혹은 단정하면, 재미없는 내용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학교 전설이 있다. 일단 잘 씻어야 한다. 면도도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침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 등산복을 입고 출근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미남미녀 혹은 인상 좋은 사람과 함께 먹으면 미슐랭 별 받은 레스토랑 음식처럼 입에 착착 감긴다던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조만간 강의에도 미슐랭 가이드가 생길지 모른다. 미(美)슐랭 별 하나, 별 둘, 별 셋….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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