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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와 ‘영웅본색’- 아날로그 VS. 디지털, 극과 극 매력으로 승부

중앙선데이 2020.01.03 17:04
 
 

[유주현 기자의 컬처 FATAL]

연말연시 공연시즌에 신작 뮤지컬 두 편이 나왔다. ‘위대한 개츠비’와 ‘영웅본색’이다. 하나는 ‘이머시브 씨어터’라는 낯선 형식을, 다른 하나는 지극히 전통적인 뮤지컬 형식을 채택했지만, 무대 연출적으로 각각 아날로그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첨단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공연의 끝, ‘이머시브 씨어터’


‘위대한 개츠비’는 최근 몇 년새 영미권에서 유행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실험적인 시도에 그쳤던 ‘이머시브 씨어터’를 최초로 본격 라이선스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이머시브 씨어터’란 관객을 객석에서 해방시켜 액자식 무대의 틀을 부수고 공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는 의미로, 2011년 영국 펀치드렁크 극단이 개발해 뉴욕 브로드웨이 전용극장에서 장기공연을 하고 있는 ‘슬립 노 모어’가 원조격이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건물 전체가 호텔로 꾸며진 공간에서 관객이 가면을 쓰고 90여개의 방을 임의로 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모티브로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퍼포먼스의 일부가 되는 ‘슬립 노 모어’에 비해 ‘위대한 개츠비’는 보다 심플한 컨셉트다. 관객은 저 유명한 개츠비의 호화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기만 하면 된다.
 
형식은 낯설지만, 내용은 우리가 아는 개츠비의 스토리 그대로다. 열렬히 사랑했지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데이지’를 잊지 못해 대저택에서 매일 성대한 파티를 열며 그녀를 기다리는 순정남. 하지만 그 집착이 결국 모두에게 파국을 몰고 오는 개츠비의 비극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2D 영화만 보다 4D 영화를 체험한 느낌이랄까.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시대. 누구나 아는 유명한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가 무대 예술의 관건이 됐다. 듣도보도 못한 방식으로 스토리텔링 기법이 다양해지고 있는 이유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이머시브 씨어터’는 가장 아날로그로 승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연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을 비극의 액자 속, 1922년의 파티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로드씨어터 대학로’등 그간 국내에서 실험적으로 선보인 ‘이머시브 씨어터’들과 가장 다른 점은 ‘뮤지컬’이라는 점이다. 통상적인 뮤지컬처럼 음악과 춤의 비중이 크지 않지만, 관객은 간단한 군무를 배우거나 노래 한 소절을 떼창하며 뮤지컬의 요소로 참여해야 한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하지만 ‘참여한다’고 해서 관객의 리액션이 공연 내용에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이 무대의 가장 두드러진 매력이라면, 배우를 ‘땀과 침이 튀길 정도’의 거리에서 가깝게 만난다는 것이다. ‘퇴근길’에서 얼굴 한 번 보려고 기다리던 배우의 일터에 당당히 들어온 셈이다. 바로 내 옆에서 그 배우가 춤을 추고, 누가 뒤에서 기대길래 돌아보면 그 배우가 웃고 있다. 인터미션에 손을 내밀며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배우’라는 존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며 친근한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고 할까.
 
첨단 테크놀로지로 부활시킨 80년대 풍경  


‘영웅본색’은 정반대다. 시작부터 배우의 스웩을 한껏 강조한다. 드라마 ‘도깨비’의 저 유명한 터널씬처럼 바바리 코트 자락 펄럭이며 나란히 등장하는 두 배우는 나와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존재다. 전설적인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연 배우 주윤발과 적룡, 장국영 처럼 말이다. 
뮤지컬 '영웅본색'

뮤지컬 '영웅본색'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 창작뮤지컬의 장인이라 할 왕용범 연출·이성준 작곡가 콤비가 1980년대로 우리를 데려갈꺼라 생각한다면 틀렸다. 1980년대의 홍콩을 가장 21세기적으로 데려왔다고 해야 맞다. 고해상도 LED 패널 1000여 장을 사용해 네온사인 휘황찬란한 홍콩의 야경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현란한 영상 기술을 동원해 수 십 차례 장면 전환을 마법처럼 매끄럽게 처리했다. 자칫 빛바래 보일 수 있는 80년대 영화를 소환해 생생하게 살아있게 한 이 무대의 숨은 주인공은 최첨단 디지털 영상 테크놀로지라 할 만하다.  
 
뮤지컬 '영웅본색'

뮤지컬 '영웅본색'

반면 감성은 철저히 복고풍이다. 원작 그대로 마약판매 조직원들의 배신과 우정, 조폭인 형과 형사인 동생의 가족애라는 ‘2중 브로맨스’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다. 앙상블을 제외하면 여자 등장인물이 단 한 명일 정도로 철저한 ‘남자들의 세상’인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의 ‘당년정’ ‘분향미래일자’ 등 너무도 익숙한 멜로디가 추억을 자극하며 한없이 편안한 감상을 준다. 주윤발의 성냥개비와 오우삼 감독의 시그니처인 비둘기 날리는 장면도 커튼콜에 깨알같이 살려냈다. 유준상·한지상·박민성 등 실력파 배우들이 뽐내는 ‘고음 맛집’도 뮤지컬 본연의 만족감을 준다.  
뮤지컬 '영웅본색'

뮤지컬 '영웅본색'

 
개츠비가 낯선 공연 형식으로 사람 냄새 픙기는 공연의 본질을 추구했다면, 영웅본색은 전통적인 공연 형식에 첨단 기술을 더해 옛날 영화 속 이야기를 무대에 되살려냈다. 두 작품 다 취향을 탄다고 할까, 관객 연령대에 따라서도 호불호가 있겠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개츠비’의 팬에게도, 영화 ‘영웅본색’의 팬에게도, 색다른 감흥을 주는 무대인 것은 분명하다. 뮤지컬 신작들이 획일적인 틀을 벗어나 저마다 다양한 방향성으로 개발되고 있는 신선한 흐름이 반가운 이번 시즌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뮤지컬 '영웅본색'

뮤지컬 '영웅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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