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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민주주의는 청와대 앞에서 멈춘다

중앙일보 2020.01.03 00:33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기업에 요구한 투명성·책임성
지금 우리 정치는 갖추고 있나
실패한 대통령 무한 반복할 건가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의 책 제목이다. 직장도 민주주의의 예외 구역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한다. “국민의 돈, 혹은 공적인 돈인 연기금이 투자되는 곳에 최소한의 직장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엄청나게 별난 일이 아니다.” 최근 국민연금은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 오너가 잘못했을 경우엔 재판 전이라도 자리에서 물러나게끔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민주주의와 기업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기업의 최고 권력도 형식상 표에 기댄다. 정치에선 한 명당 한 표지만, 주총에서는 한 주당 한 표라는 게 다를 뿐이다. 재벌의 전횡도 결국 표의 힘이다. 국내 최대 항공사 가족 간에 벌어진 ‘평창동 활극’도 표에 대한 갈구가 빚은 소동이다. 기업 투명성 요구는 기업 오너 혹은 경영진이 표의 형식논리에 숨지 말라는 주문이다.
 
2020년을 맞는 대한민국 정치는 어떤가. 과연 기업에 투명성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4월 총선에서 국민은 자신의 표가 어떤 값을 하게 될지 어림조차 하기 어렵게 됐다. 비례대표, 연동률 50%, 연동형 캡이 뒤섞인 복잡한 선거제는 ‘컴퓨터만 알면 되는’ 난수표가 됐다. 난수표를 발급한 창구는 제1 야당을 철저히 배제한 채 구성된 ‘4+1’이라는 협의체였다. 20대 총선에서 투표했던 유권자가 동의는커녕 짐작조차 못했던 희한한 ‘정치 지배구조’다.
 
공수처에 대해 반대 신념을 지녔던 여당 국회의원은 제 뜻을 드러내지 못했다. 한 의원은 기권 후 문자 테러에 시달리고, 다른 한 의원은 찬성한 뒤 자책했다. 무기명 표결에 부치자는 야당 주장은 거부됐다. 원칙적으로 국회의원의 표결은 유권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취지에서 공개하게 돼 있긴 하다. 그렇다면 한명 한명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양심을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가리는 것은 투명성에 부합하는가.
 
정치든 기업이든 투명하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는다. 언제든 견제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책임성이다. 지금의 대통령제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5년 임기 동안 국민에게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지지율을 방어막 삼아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권력을 재창출하면 성공이다. 나머지 국민은 철저한 배제와 분열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석열이 형 섭섭하다”는 끼리끼리 정서가 형성된다.
 
청와대 뜻에 반하면 ‘표적 찍기’가 횡행하는 판에 국민에 대한 책임정치는 불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권력의 정통성을 정파적 팬덤에서 찾는 행태에서 벗어날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 자리를 둘러싼 권력의 마력을 이기지 못했다. 제왕적 권력을 바꿔 보자는 논의는 40%대 지지율 속에서 실종돼 버렸다.
 
결국 제도의 문제다. ‘부드러운 신사’ 혹은 ‘싸늘한 독재자의 피’ 같은 대통령 개인의 품성 평가와는 아무 상관없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청와대 정부:‘민주 정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에서 “지금 같은 권력 구조에서는 대통령의 개인적 매력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지지세력과 직접 소통하며 대의민주주의 기구인 의회를 무시하거나 이용하는 상황을 경계한 것이다. 인기가 독선과 전횡으로 이어지다 몰락하는 대통령의 비극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무한 루프’다.
 
“경제는 2류, 정치는 4류”라던 한 기업인의 발언으로 떠들썩했던 것이 사반세기 전 일이다. 지금, 이 말이 틀렸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기업 투명성은 아직도 개선 여지가 많지만, 그래도 조금씩 진전해 왔다. 마지막 헌법 개정 이후 30년이 넘은 우리 정치는 어디에 멈춰 있는가. 민주화 이후 한 번도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지 못한 헌법은 아직도 유효한가. 민주주의가 청와대 문 앞에서 멈춘다는 소리, 이제 멈춰야 할 때가 됐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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