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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라드 칼럼] 누그러진 북한 태도가 의미하는 것

중앙일보 2020.01.03 00:31 종합 29면 지면보기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최근 북한 움직임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지난 가을에는 미사일을 쏘아대고, 지난달 초에는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미국을 위협하더니 태도가 확 달라졌다. ‘선물’은 없었고, 해마다 1월 1일에 나온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도 없었다. 지난달 28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설로 대체한 것일 수도 있고, 향후에 신년사가 나올 수도 있지만,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경제난 가중의 힘겨운 상황 추정
‘불행한 실수’로 이어질까봐 걱정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미국을 강하게 자극하는 게 북한의 이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보다 더 나은 미국 대선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선거를 망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국제 사회의 반응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이나 중국의 경고가 효과를 냈는지도 모른다.
 
전원회의에서의 김 위원장 연설 내용은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 대한 성토보다 경제 문제에 대한 얘기가 훨씬 많아 놀랍다. 김 위원장은 ‘경제 토대의 재구축’을 말했다. 북한 정권이 경제를 걱정하는 것은 분명하다. 전원회의 둘째 날 보고서에는 국가 경제의 주요 부분들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내용이 있다. 북한 정권은 경제 수준을 높이거나 최소한 현재 수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평양에 거주하는 핵심층의 생활 수준은 정권을 지탱하는 데 예민한 문제다. 그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얘기하는 순간 김정은 정권은 심각한 내부 반발에 부닥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은 집권 초기 몇 가지 조처로 경제 개혁을 시도했는데 거의 다 실패했다.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북한 정권이 유지되려면 경제적 사안들이 해결돼야 하는데,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전원회의 보고서의 ‘톤’도 북한의 변화를 보여 준다. 북미 관계 진전에 대한 실망이 곳곳에 드러난다. 미국과의 대화에 대한 의지나 희망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북한 정권이 진짜로 좌절감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있다. 보고서에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3차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나 제안이 표현돼 있지 않다.
 
보고서 내용 중 미국과 관계된 부분은 여러 차례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현이 과거보다 훨씬 모호해졌다. “우리의 억지력 강화의 범위와 정도는 미국의 향후 태도에 달려 있다”는 식의 표현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미국을 압박했다. 보고서에는 대륙 간 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재개할 것처럼 씌어 있지만, 발사에 대한 강한 의지는 담겨 있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새로운 전략무기’를 선보일 것처럼 말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SLBM)로 추정된다. 북한이 수중 바지선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적이 있기는 한데, 아직 잠수함에서 이를 발사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중 바지선에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미국이 매우 놀랄 일이 아니다.
 
북한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까? 보고서나 김 위원장의 발언은 1월은 조용히 넘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그렇다 해도 평온한 상태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경제난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 정권은 알고 있다.
 
핵실험을 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이미 핵무기를 완성했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배치되는 행동이다. 중국을 화나게 하는 일이도 하다. 그 대신 ICBM 시험 발사를 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게 먹히지 않으면 그 뒤에 무언가 더 나쁜 일을 벌일 수도 있다. 그때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에서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 그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알 수 없다. 양쪽 모두 ‘불행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2020년이 평화로운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존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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