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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일왕-女총리 대망론' 불지핀 고3 문과 톱 공주와 천재소녀

중앙일보 2020.01.02 05:00
지난해 11월 일본 궁내성이 공개한 나루히코 일왕과 딸 아이코 공주의 모습. [AP=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일본 궁내성이 공개한 나루히코 일왕과 딸 아이코 공주의 모습. [AP=연합뉴스]



2050년, 국제사회의 격렬한 주도권 경쟁 속에서 일본은 활기를 잃고 침체 상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뛰어난 능력과 탁월한 매력으로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이코(愛子)일왕과 아역배우 출신의 아시다 마나(芦田愛菜) 총리. 아이코 일왕은 나루히토(德仁) 전 일왕의 딸로 여성 일왕을 허용한 왕실전범(황실전범) 개정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아시다 총리는 39세에 일본 첫 여성 총리로 취임했다.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판타지 소설 'AA 골든에이지'라는 작품의 내용이다. 지난 해 3월부터 웹소설 플랫폼인 '카쿠요무'에 연재 중인 이 작품은 여성 일왕과 여성 총리, 두 명의 여성 지도자가 30년 후 일본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소셜미디어(SNS) 등에서 주목 받았다. 제목의 'AA'는 두 여성의 이름 '아이코&아시다'에서 왔다.    
 
일본주간지 아에라는 2020년 신년호에서 이 소설의 인기를 소개하며 '레이와(令和)' 시대를 맞은 일본에서 아이코 공주가 일왕이 된다는 '여성일왕 대망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해 5월 나루히토(德仁ㆍ58) 일왕의 취임으로 후계 문제가 일본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일왕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에게도 시선이 쏠리고 있는 것. 현재 일본 법에 따르면 여성은 일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발맞춰 여성의 왕위 계승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공주, 도쿄대냐 옥스포드냐

 
아이코 공주는 현재 만 18세. 태어날 때부터 일왕의 직계손으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성장 과정에서는 조용한 성품으로 눈에 띄는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2019년 아버지가 일왕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아이코 공주는 예의 바르고 성숙한 태도로 국민들의 호감을 얻었다. 
 
지난 해 5월 1일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의 일왕 즉위 행사에 가는 도중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해 5월 1일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의 일왕 즉위 행사에 가는 도중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특히 입시철인 요즘 관심의 포인트는 대학 진학을 앞둔 아이코 공주의 뛰어난 학업 성적. 아이코 공주는 현재 가쿠슈인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인데, 문과 톱을 달리는 성적으로 도쿄대 진학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일했던 어머니 마사코(雅子) 왕비의 학업 능력을 물려받은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최근 일본 주간지 여성세븐은 ‘아이코 공주, 도쿄대인가 옥스포드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재밌는 건 위에 소개한 소설 속에서 '일본 최초 여성 총리'로 거론되는 아시다 역시 실존 인물이란 사실. 다섯 살에 ‘마더’라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천재 아역배우'로 불렸던 아시다 마나는 현재 명문 게이오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엄청난 독서가로 알려져 있으며, 일왕 취임 행사에서 국민 대표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똑똑한' 두 소녀가 후일 일본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는 '즐거운 상상'이 이 소설의 뼈대인 셈이다. 
 
'천재 아역배우'로 불리던 어린 시절의 아시다. [사진 트위터]

'천재 아역배우'로 불리던 어린 시절의 아시다. [사진 트위터]

중학생이 된 아시다 마나. [사진 인스타그램]

중학생이 된 아시다 마나. [사진 인스타그램]

 

일본 국민 80%, 여성 일왕 찬성 

 
하지만 이 소설엔 '상상'을 넘어서는 일본 사회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아에라는 분석했다. 우선 여성 일왕을 금지하는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것인가다. ‘남계남자(男系男子) 계승’이라는 현 왕실전범을 따른다면 나루히토 일왕 이후 왕위 계승이 가능한 이는 동생 후미히토(文仁·1순위)와 후미히토의 아들 히사히토(悠仁·2순위), 나루히토의 삼촌 마사히토(正仁·3순위)가 전부다. 후미히토는 일왕과 다섯 살 차이고 3순위는 이미 80대에 접어든 점을 감안하면 실제 계승자는 현재 12살인 히사히토가 될 가능성이 높다. 히사히토가 성인이 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말 그대로 ‘왕실의 대가 끊기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여성 일왕에 대한 여론은 긍정적이다. 아사히 신문이 지난 해 4월 발표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76%가 '여성도 왕위에 오르는 게 좋다'고 답했다. 10월 교도통신 조사에서도 '여성 일왕'에 찬성한다고 답한 사람이 81.9%였다. 이에 대해 여성세븐은 "아이코 공주의 천진한 얼굴과 기품 있는 행동이 여성 일왕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높아지는 데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여성이 일본을 구할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과 통역 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일본 마사코 왕비. [유튜브 캡처]

트럼프 대통령과 통역 없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일본 마사코 왕비. [유튜브 캡처]

 
아에라는 또 떠오르는 여성 일왕론의 배후에 일본의 심각한 젠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 12월 발표한 ‘2019년 글로벌 젠더 갭(gender gap) 지수’에서 일본은 조사 대상 153개국 중 하위권인 121위에 머물렀다. 미국 등 주요 선진 7개국(G7) 중 최하위는 물론이고, 역대 최저였던 2017년 114위보다도 더 하락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집계한 일본의 2018년 1인당 명목GDP는 190개국 중 26위로, 일본 내에선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 이 같은 분위기에서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면서 '여성 지도자가 일본을 구한다'는 상상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여성 일왕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아에라는 전망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중심으로 한 보수 진영이 “전통을 깨서는 안된다”며 여성 일왕에 굳건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0월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 예식이 끝나는 대로 왕위 계승 관련 논의에 착수하기로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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