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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요즘 여성예능은 이게 다르다

중앙일보 2020.01.02 00:31 종합 26면 지면보기

대중문화속 여풍, 어디까지

3수 끝에 2019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한 개그우먼 박나래. [TV 캡처]

3수 끝에 2019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한 개그우먼 박나래. [TV 캡처]

뻔한 나눠먹기 수상으로 비판 많았던 지상파 연말 방송 시상식에서 모처럼 눈에 띄는 장면이 나왔다. MBC ‘나 혼자 산다’의 박나래가 2019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전년도 대상 수상자인 이영자에 이은 여성 수상자다. 이영자는 2018년 여성 예능인으로서는 처음으로 KBS·MBC 연예대상을 받았다. 박나래는 “저도 사람이니까 상을 너무 받고 싶었다. 어차피 키가 작아서(148cm) 높이도 못 가겠지만 항상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고 울먹였다.
 

연예대상 박나래 등 여성 파워 확인
네트워킹 팬덤 플랫폼 변화 결과
충무로 영화의 여성서사도 주목
아직은 ‘말로만 여풍’ 한계 지적도

이날 MBC 방송연예대상은 한국 방송의 변화를 웅변하는 자리였다. 들러리 수준을 벗어나 여성 연예인들이 주요 부문을 수상하고 다른 여성 연예인의 이름을 거명하며 감사를 표했다. 40~50대 중년 남성 예능인이 상을 독식하던 과거와 달라진 풍경이다. 대표적인 ‘금녀’ 프로그램인 ‘라디오 스타’에 유일한 여성 고정 MC로 입성한 안영미는 우수상(‘뮤직&토크’ 부문)을 받았다. ‘19금 개그’의 강자로 불리던 안영미는 “제가 방송용이 아니라고 위축돼 있을 때 손 내밀어준 송은이 김숙 선배에게 감사하다. 어버이 같은 분들이다”라며 넙죽 큰절했다. 안영미는 또 “(팬들) 댓글 때문에 제가 ‘라디오스타’ MC가 됐다. 제2, 제3의 안영미가 나오게 댓글의 선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송은이와 김숙도 각각 ‘버라이어티 부문’과 ‘뮤직&토크’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김숙은 “25년 만에 처음 시상식에 왔다”고 말했다.
 
남성 연예인들처럼 공공연하게 ‘유(재석)라인’ ‘강(호동)라인’ ‘(이경)규라인’을 내세우진 않지만, 자매애를 강조한 수상 소감에서 보듯 여성 예능인들끼리의 연대, 여성 예능을 지지하는 관객·팬덤의 변화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이들은, 과거 개그우먼들이 주로 ‘안 예쁜’ 외모를 셀프디스하며 ‘불편한’ 웃음을 자아냈던 것과 달리 당당하고 주변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끌어낸다. 예전에는 ‘가학적인 뚱녀’ 이미지가 강했던 이영자는 먹성만큼 인심도 좋은 대식가 언니 이미지로 재전성기를 맞는 데 성공했다. 박나래도 연예계 대표 단신이지만 그를 비하 코드로 쓴 적 없고, 오히려 과감한 패션을 시도해 ‘패피(패션 피플)’라 불린다. ‘바디 포지티비티(body positivity·어떤 몸이든 아름답다)’라는 문화 트렌드와 맞물려 나이키 광고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음식 솜씨를 발휘해 주변을 챙기고 손님맞이를 즐기는 손 큰 생활인 이미지도 강점. 박나래는 한국 여성 예능인 최초로 넷플릭스에서 단독 스탠드업 코미디(‘박나래의 농염주의보’)를 진행하며 이름값을 인정받기도 했다.
 
안영미·송은이·김신영·신봉선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 ‘셀럽 파이브’. [TV 캡처]

안영미·송은이·김신영·신봉선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 ‘셀럽 파이브’. [TV 캡처]

이같은 한국 여성 예능의 약진에는 단순한 예능인을 넘어 기획자 제작자로 변신한 전략가 송은이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킹의 힘이 컸다. 송은이는 남성예능 일변도인 지상파에서 설 자리를 잃자 2015년 김숙과 함께 시작한 고민상담 팟캐스트(‘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가 호평을 받으며 지상파로 역진출한 케이스다. 이후 팟캐스트·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여성예능 형식 실험을 펼치며 개그우먼들을 규합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여성을 주변화하는 기존 남성예능에 대한 여성 시청자들의 거부감을 포착했다. ‘먹장군’ 이영자와도 친분이 깊다. 김숙이 2017년 JTBC 리얼리티 ‘최고의 사랑’에서 선보인 ‘가모장(가부장에 반대되는 말)’ 캐릭터 역시 한국 예능의 역사에 획을 그었다. 송은이·안영미 등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 ‘셀럽 파이브’가 아이돌 요정 이미지를 풍자하며 발표한 ‘안 본 눈 삽니다’ 등은 온라인에 널리 퍼졌다. 지배적 여성상에 반감 있는 젊은 여성들이 열심히 퍼 날랐다. 평론가 정덕현 씨는 “여성 예능인층이 두터워지면서 예능 프로그램의 다양화에도 일조하고 있다”고 평했다.
 
MBC 방송연예대상에서‘베스트 엔터테이너’ 부문을 수상한 개그우먼 장도연. [TV 캡처]

MBC 방송연예대상에서‘베스트 엔터테이너’ 부문을 수상한 개그우먼 장도연. [TV 캡처]

예능뿐 아니다. 특별히 페미니즘적 이슈를 내세운다기보다 캐릭터 등 방송 전반에 ‘여풍’이 거세다. KBS ‘거리의 만찬’은 개그우먼 박미선을 중심으로 여성 진행자로만 구성된 시사 토크쇼다. 여자 아이돌 경연 프로인 m.net ‘퀸덤’은 오디션 일반의 적대적 대결이 아니라 우애와 공존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워맨스(여자들끼리의 케미스트리)’를 강조한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나 조선 과부들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액션을 펼치는 KBS ‘녹두전’처럼 달라진 여성상은 기본이다.
 
10대 소녀의 서사가 늘어난 것도 최근 충무로의 경향이다. ‘벌새’는 성수대교 참사를 겪는 10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사진 에피파니]

10대 소녀의 서사가 늘어난 것도 최근 충무로의 경향이다. ‘벌새’는 성수대교 참사를 겪는 10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사진 에피파니]

충무로의 변화도 눈에 띈다. 김보라(‘벌새’), 윤가은(‘우리집’) 감독 등 젊은 여성 감독들이 약진하면서 다양한 여성주의 서사를 선보였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 속에 시장에서도 선전했다. 젠더 갈등을 다루면서 가족의 화합을 강조한 ‘82년생 김지영’은 일찌감치 사회적 현상이 됐고, ‘벌새’ ‘우리집’ ‘영하의 바람’ 등은 그간 ‘여고괴담’ 류의 학원 공포물 외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10대 소녀 이야기로 눈길을 끌었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배경으로 한 ‘벌새’는 해외 44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사회적 삶과 개인의 삶을 겹쳐놓는 방식 자체야 새로울 것 없지만, 한국 영화가 10대 소녀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중년여성이 주인공인 퀴어물도 등장했다. 50대 주부가 첫사랑을 찾아가는 ‘윤희에게’서는 10대인 딸과 노모 등 주변 인물들이 중년여성의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걸캅스’는 여성 투톱 액션의 상업적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고, “1000만 영화 ‘엑시트’도 재난을 해결하는 남녀 주인공의 고른 역할분배가 돋보였다”는 평(평론가 이승환)이 나왔다.
 
물론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여성예능이 강세라고 하지만 수적으로는 열세다. 2019년 지상파 방송연예대상에서도 MBC를 제외하고는 여성 수상자가 드물었다. KBS와 SBS의 방송연예대상은 각각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빠들(샘 해밍턴 등)과 ‘런닝맨’의 유재석이 차지했다. MBC 역시 대상을 빼고는, 남녀 부문을 따로 뒀기에 ‘여풍’이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열린 ‘한국영화, 사라진 여성을 찾아라’ 심포지엄에서는 지난 10년간 한국영화의 제작환경과 내용 모든 면에서 성평등 정도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조혜영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성평등소위원회 위원은 2009~2018년 개봉한 한국영화 1433편을 분석한 결과, 남녀 감독 성비가 10년째 9대1 에 머물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 위원은 “2019년 처음으로 여성감독 비율이 10%를 간신히 넘었다”며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는 연결돼 있다. (감독, 제작자, 스태프, 교원 등) 모든 영역에서 5 대 5까지 양적 평등을 끌어올릴 때 성 평등이라는 질적인 변화를 지속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인공지능(AI)을 통해 영화 속 성별 묘사를 분석한 이병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2017~2018년 개봉한 흥행작 40편(한국 20편, 할리우드 20편)을 분석해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보다 덜 성 평등적”이란 결론을 내놨다. ‘감정적 다양성’ ‘공간적 역동성’ ‘시간적 점유도’ ‘외양 강조도’ 등 8가지 지표로 영화 내 성별 묘사의 편향성을 파악한 결과다. 이 교수는 “8개 지표 대부분에서 남녀 차이가 나타났으며,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보다 성별에 따른 차이가 컸다”고 밝혔다. “실제 사회에선 여성의 감정 다양성이 남성보다 높은데 영화는 반대며, 고른 연령대의 남성과 달리 여성은 20~30대에 집중되고 여성 주변에 비전문적 물품이 배치되는 등 ‘젊은 여성이 더 가치 있다’‘여성은 전업주부’라는 사회적 편견을 영화가 답습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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