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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순의 퍼스펙티브] 북·미에 비핵화 의존하면 한국의 운명 위태로워진다

중앙일보 2020.01.02 00:25 종합 24면 지면보기

국가 안보 나침반 재검토해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혀 새해 한반도가 격랑에 휩싸일 것임을 예고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 위원장. [중앙포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혀 새해 한반도가 격랑에 휩싸일 것임을 예고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 위원장. [중앙포토]

새해 벽두에 북한이 더는 ‘대화와 제재’라는 모순적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예견된 것이지만 지난 2년여 우리를 혼란시켜온 두 그림이 떠오른다.
 

지난 2년간의 안보전략 기초 가설 뒤집어 봐야
‘핵은 북·미, 한반도는 남·북’ 이분법은 비현실적
한국 빠진 북·미 입장만으론 비핵화 돌파 못 해
새해 한반도 정세는 열정보다는 냉정 필요로 해

“어른거리는 연둣빛을 배경으로 파란 다리 위에서 대화를 나누던 저 묵음의 장면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일보 2018년 7월 24일자 문학평론가 이광호, 4월 27일 판문점 도보다리 남북 정상 대화에 대해)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가짜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진짜인 줄로 여기며 이 순간을 누리는 것뿐이다.” (중앙일보 2018년 6월 29일자 스티븐 해거드 UC샌디에이고 교수,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그간 우리는 톱 다운과 원샷 딜을 통해, 고르디우스 매듭을 자르듯이 기존 외교 문법에 없는 방식으로 평화 경제를 찾아가다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곳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 북한은 핵을 들고 한반도의 주인 노릇을 하려 들고, 미국은 천문학적 수준의 핵우산 가격을 요구한다. 중국은 한국을 미국에서 떼어 놓으려 하고, 일본은 미국의 카드까지 빌려서 한국을 주저앉히겠다고 나선다.
 
가다가 길을 잃어도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북한은 핵무기는 둔 채 제재부터 해제하라고 한다. 아니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상징되는 전략무기를 보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북한이 실전용 ICBM을 입증하기에는 기술적으로는 멀고 정치적으로는 위험하다. 과거 미국·소련·중국은 1세대 ICBM을 실전 배치하기까지 대개 30여 회 이상의 실험을 거쳤다. 북한은 이제 3차례 초보 실험을 했다.
 
언젠가는 미국을 타격할 수준의 궤도 재진입과 방어 교란 장치를 실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선제 타격을 부르는 초청장이 될 것임을 김정은도 알 것이다. 그의 행동 범위는 그간 부풀린 트럼프의 협상 성과를 흠집내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그보다 더 믿을 구석은 한국·일본을 사정권에 둔 핵미사일일 것이다.
  
트럼프, 북핵 폐기에서 무기 판매로
 
평양은 서울이 워싱턴을 설득해서 제재를 해제시키거나, 아니면 독자적 행동이라도 기대했다. 그러나 서울의 한계를 알고 나서는 험한 말을 쏟아냈다. 북한은 남한의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데 익숙하다. 조금만 사정이 바뀌면 ‘우리 민족끼리’로 돌아올 것을 자신한다. 한반도 안보 구도의 주인은 ‘핵을 가진 북한’이라는 자부심과 허세도 엉켜있다.
 
핵은 손에 든 채 제재는 해제해 달라는 북한식 셈법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정면 배치된다. 트럼프의 국내 정치 계산에 특히 맞지 않는 거래다. 그는 3차례 김정은을 만나고 군사 훈련을 축소한 것만으로도 북한의 그간 행동에 충분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제재 해제를 위해서는 우라늄 농축 금지와 이를 사찰·검증하는 장치에 합의하라는 것이다. 이미 제조한 핵무기는 언젠가 폐기한다는 원칙에만 우선 합의하자고 한다.
 
논리적으로는 접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김정은은 언제 바뀔지 모르는 미국의 정치, 특히 트럼프를 믿고 한번 내놓으면 되돌릴 수 없는 사찰·검증 카드를 먼저 던지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트럼프는 2018년 4월 귀가 솔깃해서 ‘북핵 폐기 재개발 외교’에 착수했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나서는 기대를 접어가고 있다. 김정은에게는 작은 명분이라도 주어서 상황 악화를 막아보려 할 것이다. 재개발 외교의 현장은 방위비 분담과 무기 판매로 옮기는 중이다.
 
중국은 어떤가. 김정은은 2018년부터 계기마다 시진핑을 찾았다. 중국의 참여는 북한 문제의 관건이다. 그런데 지난해 미국이 중국 봉쇄를 겨냥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놓았다. 미·중 무역 전쟁의 파장과 함께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두고 미국과 타협할 여지는 더욱 축소되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지난달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를 해제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도 허락하자는 것이다. 여차하면 대북 추가 제재를 들고나올 미국에 대해 미리 맞불을 놓았다. 지난해 6월 시진핑이 평양을 방문해 “조선의 합리적 안보 우려와 발전의 관심사를 해소할 수 있도록 힘이 닿는 한 도울 것”이라고 공개 약속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베이징-도쿄 악수하면 서울 작아져
 
중국과 러시아는 또 북·미 협상에 맥이 빠지는 것을 보고 2008년 말 이래 사장 상태에 있는 6자회담을 들고 나왔다. 미국은 물론 북한도 달가워하지 않을 제안이다. 하지만 6자회담 재개 시도는 어느 정도 동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자신이 소외된 상태에서 한반도 정세가 질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늘 경계한다. 그래서 평창올림픽 이후 전개된 드라마를 주시했다. 그러나 우려할 만큼 판이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 만약 한반도 정세에 지각 변동이 일었다면 지금의 한·일 관계도 달리 전개되었을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 11월 한·일 군사정보 보호 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단계적 수출 규제 완화로 서로 체면은 살린 것으로 본다. 반면 일본은 미국의 손이 작용해서 한국이 물러섰다고 간주한다.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 이래 양국 관계의 저류를 이룬 도덕적 부채 의식에서 탈피하려 한다. 일본과 중국은 올해 시진핑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전 지구적 파트너십을 구축하려고 한다. 한국은 지금 이들 모두와 별로 편하지 않다. 베이징과 도쿄가 악수하면 서울은 작아진다.
 
2020년 한반도와 주변 정세는 열정보다는 냉정을 필요로 한다. 북한은 북·미 회담과 관계없이 핵·경제 병진 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이 정책은 북한의 고유 노선이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이 길을 걸었다. 핵무기를 개발한 후엔 국방 예산을 축소하여 경제에 투입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1960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각각 7%, 6.2%였다. 그러나 80년에는 냉전이 한창인데도 각각 4.8%, 3.8%로 축소했다. 북한이 원하는 효과다.
  
핵 가진 북한과 공생 가능한가
 
김정은은 제재가 완화되지 않는 한 다양한 도발을 단계적으로 시도할 것임을 예고했다. 주로 4월 총선을 앞둔 한국과 11월 대선을 치르는 미국의 취약점을 겨냥할 것이다. 대남 국지 도발을 펴거나 위성 로켓으로 미국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고 해서 제재 수위를 올리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미 빗장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결정적 명분을 제공하지 않는 한 미국의 독자적 군사 행동도 어렵다. 2018년 갤럽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민 70% 이상이 개전과 종전의 조건이 분명하지 않은 해외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에도 여론 경향은 비슷하다. 중국의 개입을 유발할 군사 행동의 조건을 충족하기는 어렵다. 선거를 눈앞에 둔 트럼프가 할 모험은 아니다.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지난 2년간 국가 안보 전략의 기초가 되어온 가설과 기대를 뒤집어 봐야 한다. ‘핵 문제-북·미’, ‘한반도 문제-남·북’이라는 이분법이 현실적인지, 탄핵과 대선 정국의 트럼프가 한국의 안보를 얼마나 생각할지, 중·일은 손을 잡는데 한·일은 역사의 감옥에 갇혀 있어도 되는지, 그리고 핵을 가진 북한과 공생은 과연 가능한지, 한반도 핵 균형의 미래는 어떤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김정은이 새해 어떤 행동을 보이든 지금 우리가 헤매고 있는 이 지형과 지세는 별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국가 안보 나침반이 제대로 작용하는지부터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키워드
고르디우스 매듭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 왕의 전차에 매달린 매듭을 아무도 풀지 못하자 한칼에 잘랐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2018년 3월 비핵화와 대북 제재와 관련해 “여러 가지 복잡하게 꼬인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고르디우스 매듭과 같이 (단번에) 끊어버리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비핵보유국의 핵무기 보유와 핵보유국의 핵무기 양여를 금지하는 조약. 미국과 구소련 주도로 성립됐다. 중국·영국·프랑스를 포함한 5개국의 핵무기 독점 보유를 인정하는 대신 다른 가맹국의 핵무기 개발·도입·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가 특별핵사찰을 요구하자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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