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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새로운 길 아닌 과거의 길 택했다···"정면돌파" 22차례

중앙일보 2020.01.01 16:02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지도했다고 1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사진은 전원회의에 참석한 김 위원장의 모습을 조선중앙TV 가 방영한 것이다.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지도했다고 1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사진은 전원회의에 참석한 김 위원장의 모습을 조선중앙TV 가 방영한 것이다. [뉴스1]

1월 1일 새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2년 집권 이후 처음이다. 신년사 육성 연설은 대외 메시지인 동시에 북한 주민을 향한 연설이다. 대북 제재 하에서 그동안 자신이 약속했던 경제 개발과 대미 협상의 성과가 부진했던 탓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의 보고 내용 요약으로 대체한 듯
미국과 협상 장기전 대비 자력갱생, 정면 돌파 의지 피력
"새로운 전략 무기 볼 것", "얽매이지 않겠다" 면서도
명시적 선언이나 말폭탄은 없어, 대미 협상 여지

대신 김 위원장은 나흘 짜리 전원회의를 개최해 엘리트를 단속했다. 북한이 내보냈던 방송 화면 등을 보면 노동당 청사 별관을 가득 메운 최대 1000여명으로 추정되는 북한 파워 엘리트들은 나흘 동안 '받아쓰기'에 열을 올려야 했다.
 
북한 매체들은 이날 오전 9시부터 신년사를 대신해 4일간의 전원회의를 총정리한 55분짜리 결과(보고)를 내보냈다. 핵심 구호는 김 위원장 스스로 밝힌 대로 "우리의 전진을 저애(저해)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 나가자"였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새로운 길'을 꺼낼 수 있다고 언급한 데 이어,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 후 열린 지난해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연말시한'을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전원회의 결과는 '과거의 길'이었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과 대북 제재로 어려워진 경제 여건을 자력갱생을 통해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정면 돌파'라는 표현은 모두 22차례나 사용했다. 경제 개발 부진의 책임을 물은 듯 당 부장의 절반 이상을 교체하는 등 대규모 인사도 단행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 위원장이 '핵·경제 병진 노선'으로 회귀했다거나, 김정일 시대로 돌아간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북한이 지난달 28일부터 31일까지 노동당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진행했다고 조선중앙TV가 1일 보도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대미정책과 전략무기 개발을 언급한 대목에서 나온 사진으로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과거 열병식 때 등장한 무기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달 28일부터 31일까지 노동당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진행했다고 조선중앙TV가 1일 보도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대미정책과 전략무기 개발을 언급한 대목에서 나온 사진으로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과거 열병식 때 등장한 무기다. [연합뉴스]

결과 보고에서 김 위원장은 "세상은 머지않아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렴치한 미국이 조·미(북·미) 대화를 불순한 목적 실현에 악용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깨끗이 다 받아내기 위한 충격적인 실제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다. 김 위원장의 이날 발언 중 가장 강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핵 군축과 전파 방지를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말했지만, 명시적으로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진 않았다. 나아가 "우리의 억제력 강화의 폭과 심도는 미국의 금후 대조선 입장에 따라 상향 조정될 것"이라고 언급, 향후 미국과의 협상 여지를 열어놓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김 위원장은 약속을 지킬 것"이라며 부드러운 반응을 내놓았다. 김 위원장이 직접 화면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트럼프 대통령과의 '좋은 관계'를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이날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대북 특별대표인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김 위원장의 발언 내용에 안도했다는 후문이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미국과의 대화 중단을 선언하지 않은 것을 평가한다"고 밝혔다. 전현준 국민대 겸임교수는 "예상보다 대미 비난이나 군사적 도발 예고 강도를 낮춘 건 향후 미국과의 협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도발 억제 노력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6일 중·러는 예고도 없이 대북 제재 일부 해제를 골자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내면서 '북한 달래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해 12월 초만 해도 북한은 두 차례(12월 7일과 13일) 미사일 엔진 연소실험을 했다. 군 정보당국에 따르면 곳곳에서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TEL) 기동 장면을 연출하면서 군사 도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북한이 방향타를 튼 시점이 결의안 제출 시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중·러는 대북 제재 하에서 북한의 경제 '숨통' 역할을 하는 국가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이날 전원회의 결과 보도를 하면서 '우리의 총창우(위)에 평화가 있다'는 경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택했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평화가 아무리 귀중해도 절대로 구걸은 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대북 제재 장기화를 대비해 체제를 단속하려는 김 위원장의 생각이 담긴 듯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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